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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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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미가 외채 위기에서 벗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말, 워싱턴에서는 남미 국가들이 추구해야 할 주요 정책 어젠다에 대한 합의가 나왔다.

즉 남미 국가들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물가 불안을 잡고, 시장의 힘을 중시하며, 무역과 해외 직접투자를 위해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 남미 경제위기 재발한 까닭

80년대에 이 같은 논리는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경제정책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개도국에서 개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남미의 경제개혁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놀랍게도 이 용어는 유명해졌다. 일부 개혁론자들은 이 용어를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기고, 자신들이 냉전에서 승리한 쪽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개혁이 내부의 토론을 거쳐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 의해 강제로 시행되고 있다며 이 용어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개혁 반대자들은 개혁을 무산시키기 위해 '워싱턴 컨센서스'를 공격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이 용어를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훨씬 극우적인 정책으로 재해석했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본에 대한 모든 통제를 철폐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최근 남미의 경제위기 재발과 저성장.빈곤.소득격차 등 실망스러운 경제 성적표가 '워싱턴 컨센서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위기는 이 나라가 90년대 초 도입한 수입 자유화나 공기업 사유화 등의 개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에 의한 것이다.

하나는 자국 화폐인 페소와 달러의 교환비율을 1대1로 묶어버린 것이다. 이는 브라질 헤알화의 가치 하락과 달러의 강세로 아르헨티나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둘째는 세계 투자자들이 아르헨티나를 좋은 투자처로 여기고 있을 때 이 나라는 부채비율을 줄이려 하기보다 과소비에 여념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받쳐주는 십계명에 경쟁력있는 환율과 건전 재정이라는 두 계명을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최근 몇년간 남미의 경제 성적표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초라하다. 따라서 남미 국가들이 추진했던 정책 어젠다를 재점검, 더 빠르고 지속 가능하며 균형잡힌 성장을 위해 정책방향을 재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89년 내가 제시했던 정책 어젠다에 공감한 사람들조차도 세월이 변했으므로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미 국제경제연구소가 최근 펴낸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남미의 성장과 개혁 재추진'에서 밝힌 정책 어젠다는 원래의 것과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난다.

하나는 외국인 직접 투자 등 일부 개혁은 이미 성취됐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새로 설정해야 했다.

둘째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미국이 설정했다고 해서 제3자에게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 어젠다도 주로 남미를 대상으로 했으며, 남미 이외의 나라에서 똑같이 적용할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원래의 '워싱턴 컨센서스'와 유사하다.

*** 경기 순환에 대응할 재정정책을

새 어젠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나오는 물가 안정과 자유화라는 개혁 노선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대로 노동시장 유연화 등 어떤 면에서는 자유화를 더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자극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있는 국가기관의 역할을 강조한다. 또 경제성장과 비슷한 정도로 분배에 관심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원 마련 등을 위해 재산세 등을 도입하는 것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토지.소액융자 등의 정책 수립을 중시한다.

그러나 새 어젠다의 가장 큰 특징은 남미 경제가 위기를 견딜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공공부채에 대해 일정한 원칙을 제시해 재정정책이 경기순환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정리=정재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