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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만에 쟁취한 독립 … 한은이 ‘물가 안정’에 집착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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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호 18면

서울 남대문로 한은 본관 로비에 걸린 현판

한편에선 한국은행에 “더 이상 물가에만 집착해선 안 된다”고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선 “역할 확대 운운하며 한은을 조종하려는 정부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세계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의 칼을 휘두르는 이때, 한은은 왜 주저주저하고 있는 걸까.

역사를 통해 본 한국은행 역할 변화

어느 나라 중앙은행이든 물가 안정이 제 1 목표일 수밖에 없다. 돈을 찍어내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돈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가 내리면 돈 가치는 올라간다. 물가 안정에 대한 한은의 집착을 차현진 한은 커뮤니케이션 국장은 이렇게 표현한다. “경찰은 도둑을 잡기 전에 스스로 법을 지키는 게 먼저다. 한은 역시 제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내도 돈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면 제 몫을 했다고 볼 수 없다.”

한은이 물가 안정에 집중할 수 있었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50년 설립된 뒤 40여 년 동안 한은은 이른바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렸다. 97년 한은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재무부 장관이 금융통화위원장을 맡았다. 경제성장을 원하는 정부가 통화량을 좌지우지했다. 물가가 치솟아도 금리를 과감히 올리거나 통화량을 절도 있게 줄이는 결정을 한은 차원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앙은행 독립 논의가 시작된 건 87년이다. 민주화 물결을 타고 제 17대 김건 총재가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며 중앙은행 독립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97년 한은법이 개정되고 한은 총재가 금통위원장을 맡게 됐다.
어렵게 쟁취한 독립이기에 한은이 전반적으로 ‘매파(경기 긴축주의자)’ 성향을 띄게 됐다는 게 안팎의 분석이다. 한은의 한 고위 간부는 내부 논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앙은행은 정부의 성장 일변도 정책을 견제할 책무가 있다. 남대문 출장소 시절처럼 통화량 확대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이라면 왜 독립했겠느냐. 한은은 정부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행정부와 한 몸처럼 움직이거나 행정부처럼 행동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나 유럽중앙은행(ECB)과 한은의 괴리는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특히 Fed와는 법에 명시된 설립 목적 자체가 다르다. Fed는 물가뿐 아니라 고용 안정까지 책임지는 기구다. 물가가 안정돼도 경제가 성장하지 않아 실업률이 치솟으면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한은은 2011년 법 개정으로 ‘금융 안정’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추가하긴 했지만 여전히 경기 부양이나 성장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일각에선 한은이 법에 명시된 목적을 좀더 넓게 해석해 물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의 조화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의 독립성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지, 무조건 정부에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며 “선진국일수록 재정 정책의 여력이 떨어져 통화 정책이 중요해지는 만큼 정부와 중앙은행이 긴밀히 협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으로 디플레이션을 벗어나려는 일본에선 특히 중앙은행과 정부의 공조가 강조되고 있다. 크레디스위스증권 치프 이코노미스트인 시라카와 히로미치(白川浩道)는 최근 『고독한 일본은행』이라는 책에서 일본은행의 독립을 ‘조건부’ 또는 ‘범위한정적’이라고 표현하며 경제정책에서 정부와 일본은행의 공동책임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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