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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자살자 휴대폰 없는데 … 웬 도움전화 권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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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앨런 버먼은 “누구나 학업 스트레스를 경험하지만 대부분 죽지 않는 것처럼 자살은 한 가지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 중앙심리부검사업단]

“자살을 예방하려면 정확한 자살 원인부터 찾아내야 한다. 자살 원인을 추정하는 ‘심리적 부검’을 활성화해야 한다.”

 ‘자살학(Suicidology)’의 권위자로 불리는 앨런 버먼 박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0년째 자살률 1위인 한국에 해준 핵심 조언이다. 자살률을 낮출 해법을 찾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개최한 심리적 부검 훈련 프로그램 워크숍(8∼10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버먼 박사를 중앙일보가 7일 인터뷰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 아메리칸대에서 심리학과 종신 교수를 지냈고, 미국 자살학협회장과 국제자살예방협회장을 역임했다.

 심리적 부검은 가족·친구·동료 등 주변사람을 통해 사망자의 심리·행동 변화를 되짚고, 진료·금전·체납 등 객관적 기록을 검토해 자살 원인을 추정하는 방법이다. 버먼 박사는 “심리적 부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행정부·의료기관·수사기관이 정보를 공유하고 범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리적 부검으로 자살 원인을 밝히면 예방책을 더 정확하게 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귀향한 미군 병사들의 자살 사건을 예로 들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참혹한 전쟁 후유증’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심리적 부검을 했더니 자살의 주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전우애와 팀워크로 다져진 단체 생활을 하다가 개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거나, 부부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살하는 귀향 군인이 더 많았다. 이에 따라 미군 당국은 귀향 군인들에게 적응 훈련을 대폭 강화했다.

 또다른 사례도 있다.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이 늘자 미국 철도 회사들은 ‘다시 생각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세요’라는 문구를 역사에 내걸었다. 그런데도 자살자가 줄지 않았다. 심리적 부검을 했더니 자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 버먼 박사는 “자살자의 상태를 모르고 만드는 예방책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자살을 쉬쉬하는 한국 문화 때문에 심리적 부검이 미국처럼 자리 잡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버먼 박사는 “신종 질병이 출현해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하자.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은 원인과 예방책을 찾으려는 당국의 조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다. 자신들이 다음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살도 이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그는 “자살에는 사회적·개인적 위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은 신체적·정서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호주·뉴질랜드는 자살 예방 정책에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한국 정부도 자살 예방 전략을 국가 어젠다에 우선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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