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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친일파였을까, 그의 라이벌도 아니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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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은 한국사에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최초의 정치적 개혁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적이자 집권 핵심세력이던 민씨 일파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시작한 한계도 있다. 신분제 폐지, 입헌군주제 수립 등 근대국가에 맞는 정치·사회 개혁을 천명했음에도 ‘위로부터의 개혁’에 그쳐 민초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정변 주도세력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했으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과 대립하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면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교과서와 언론이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글=성시윤 기자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김옥균(1851~1894) 안동 김씨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장원급제 해 수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3세에 홍문관 교리로 벼슬을 시작해 승정원·이조·호조·외아문 등에서 요직을 거쳤다. 홍영식·서광범·박영효 등 다른 양반 자제들과 함께 박규수(1807~1876)에게 개화 사상을 익혔다. 개항(1876) 후 김옥균은 군사·외교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에 등용돼 개화정책을 담당했다. 1882년 수신사 사절단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대해 알게 된 뒤 조선도 일본과 유사한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는 와중에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자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에서 민씨 정권 고관들을 죽이고 개화당 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청의 개입으로 ‘삼일천하’에 그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중 고종에게 상소문을 보내 신분제 폐지, 조선의 중립국화를 주장했다. 일본의 비협조적 대우에 실망해 1894년 청나라로 건너갔다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정치적 라이벌…민씨 집권세력, 온건 개화파

 고종 외척인 민씨 세력은 갑신정변보다 2년 앞서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권을 잡았다. 임오군란은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가 확대되는 가운데 구식 군인들이 형편 없는 처우에 불만을 느껴 일으켰다. 명성황후 오빠인 민겸호가 구식 군인의 봉급을 담당하는 선혜청 책임자였다. 신변 위협을 느낀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고 임오군란 수습 후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은 심해졌다.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고, ‘조·청 상민 수륙 무역장정’이라는 불평등 조약도 강제로 맺게 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대한 입장과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갈렸다. 김옥균이 이끄는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 바꾸고자 했다. 반면 온건 개화파는 중국 양무운동처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동양의 도리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점진적 개화를 하자고 주장했다.

①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사진 독립기념관] ② 김옥균이 갑신정변 중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터트리도록 시킨 폭약을 뭍어둔 인정전. ③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당시 병아리 싸움을 통해 정쟁의 덧없음을 비유한 시. ④ 일본망명 중 일본인 스나가에게 써준 서예작품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 민중 호응 못 얻은 건 한계

 민씨 세력의 집권, 그리고 청의 내정 간섭 속에서 김옥균 등이 꿈꾸던 개혁 정책은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김옥균은 개혁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일본 차관 도입을 시도했으나 민씨 세력 등의 견제로 실패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리베르는 ‘김옥균은 부족한 국가 재정과 정치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방해와 일본인들의 농락으로 겨우 17만원을 구하는 데 그쳤다’고 썼다. 교학사도 ‘김옥균과 민씨 일파는 경제정책에 있어 일본의 차관 도입과 당오전 발행을 두고 서로 대립했다. 청의 후원을 받는 민씨 일파들은 급진 개화파 인물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급진 개화파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려 정변을 계획하였다’고 썼다.

 갑신정변 주역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이른바 ‘급진 개화파’였다. 이들은 1884년 10월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에서 개화에 반대하는 수구적 인사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교과서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으며,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고 갑신정변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됐고, 정변이라는 급진적 방식을 택한 점’ ‘일본의 군사적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점’ 등을 한계로 지적한다. 또 ‘농민의 염원이었던 토지 개혁에 소홀하여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든다.

 언론도 김옥균이 근대적 개혁을 주창한 사상가였던 점을 높이 산다. 그러면서도 정변 실패로 개혁 기운이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본다.

 “조선에서도 변화의 바람을 느낀 이가 적지 않았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홍영식·서재필 등이다. 개혁의 방향은 옳았다. 설익은 변혁 시도가 문제였다. 갑신정변 실패 후 개혁의 동력을 거의 상실했다. “(중앙일보 2010년 8월 25일 34면 ‘변화의 바람을 보았다’)

 “김옥균이 쓴 『치도약론』에는 근대적 국가의 운영을 위해 인구통계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돼 있다. 그는 ‘지금 구미의 모든 나라에서는 호적법을 실시해 매년 호구를 조사하여 남녀의 죽고, 살고, 옮겨가는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2011년 5월 12일자 33면 ‘미혼모는 없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주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옥균은 일본과 중국을 떠돌다 상해에서 암살당했다. 반면 서광범과 박영효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1894년에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고 박영효는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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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들은 김옥균의 친일 논란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 지학사는 김옥균이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옥균이 조선 정부와 교섭에 걸림돌이 되자 일본 정부는 암살을 핑계로 김옥균을 태평양 남쪽의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하기도 하고, 북쪽 끝 삿포로에 연금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천재교육은 동시대 인물로 온건 개화파에 속하는 김윤식, 그리고 위정척사론을 계승한 박은식이 김옥균에 대해 내린 평가를 싣고 있다. 김윤식은 ‘나는 청나라 당으로 지목되었고, 김옥균은 일본 당으로 지목되었다. 나는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다른 나라에 있지 않았고, 애국하는 데 있었다’고 자신의 책 『속음청사』에 썼다. 박은식도 『한국통사』에서 ‘(김옥균 등) 일류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 크나큰 착오를 저질렀던 것. 일본이 조선과 청의 악감정을 도발해 그 속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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