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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찾아가기] 통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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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선망하는 직업을 생생하게 소개하는 ‘진로 찾아가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직업 현장을 찾아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또 그 직업을 갖기 위해서 어떤 길이 있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중고생 눈높이에 맞춰 알려드립니다. 11회는 통역사입니다.

정상회담·국제회의와 같은 국제 외교, 다국적기업의 무역 협상, 각종 학술 세미나와 포럼 등 세계 각국의 정치·경제·문화·학술 교류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런 전문화한 국제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전문 통역사다. 치열한 외교 전쟁도, 기업의 명운을 건 협상 테이블도, 전문적인 학술 논쟁에도 통역사가 빠지지 않는다. 통역사 역할이 중요한 자리일수록 부담은 크지만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한다는 성취감도 높다. 통역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알아봤다.

정현진 기자

양국 정상이 만나는 정상회담에선 통역사가 정상 바로 옆에 배석해 통역한다. 그래서 사실상 의전을 해야할 때도 적지 않다. 외교부 한러 통역 담당 배선경 사무관(박근혜 대통령 왼쪽)이 지난달 열린 한-우즈베키스탄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 발언을 통역하고 있다.

통역이라고 하면 동시통역을 떠올리지만 통역엔 동시통역 말고도 순차통역이 있다. 동시통역은 말 그대로 국제회의나 세미나 등에서 화자(話者)의 말을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걸 말한다. 다수의 언어가 사용되거나 빠른 진행이 필요한 자리에서 주로 쓰인다. 통역사는 통역 부스 같은 별도의 통역실에서 헤드셋·마이크를 이용해 통역한다. 청중은 무선 통역기로 통역을 듣는다.

 순차통역은 속도보다는 정교하고 정확한 의사전달이 필요한 자리에서 쓰인다. 통역자는 발언자 바로 옆에서 말을 듣고 통역을 한다. 발언의 맥락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한두 문장을 듣고 순차적으로 통역을 한다. 양국 간 정상회담이나 통상협상 등 외교 석상에서 노트와 필기도구를 들고 정상이나 외교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순차통역을 하는 통역사다.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한아과(한국어-아랍어) 곽순례 교수는 “동시통역은 속도, 순차통역은 정확도가 핵심”이라며 “2~3초 간격을 두고 곧바로 통역하는 동시통역은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 순차통역은 단어 뉘앙스까지 정확하게 전달하는 꼼꼼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언어 종류에 따른 통역수요를 보면 역시 한영 통역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중국어·일본어 순이다. 최근엔 아랍어·러시아어 통역도 인기다. 수요에 비해 통역사가 부족한 상황이다. 곽 교수는 “한국 병원에서 진료받기 위해 방문하는 중동인·러시아인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동남아·남미 국가와의 무역 규모도 확대되는 추세라 앞으로는 말레이어·베트남어·포르투갈어·스페인어등 새로운 통역 수요도 꾸준하게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매 순간 긴장…고도의 집중력 필요

 통역의 세계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특히 여러 나라에서 모이는 국제회의의 동시통역은 몇 초의 망설임도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해야 한다. 국제회의에서 통역사는 한국어→영어, 또는 영어→한국어 등 두 언어만 통역하는 게 아니라, 세 언어를 릴레이로 통역하기도 한다. 예컨대 연설자가 영어로 발언한다면, 1차 동시통역 담당자가 영어를 한국어로, 그 다음 2차 통역 담당자가 한국어를 다시 불어·러시아어·일본어·중국어·아랍어 등으로 다시 통역하는 식이다. 영어→한국어→제3외국어로 이어지는 릴레이 동시통역은 불과 몇 초의 시차로 이뤄진다. 프리랜서 한영 통역사로 활동 중인 권상미(31·여)씨는 “동시통역은 귀로 듣는 동시에 다른 언어로 말해야 한다”며 “초 단위로 어휘·표현을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통역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 통역 한마디가 협상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 수도, 국가 간 외교마찰을 빚게 할 수도 있다”며 “책임감과 부담감이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연사가 통역사에게 사전에 제공한 연설문대로만 발언하면 통역이 쉽다. 하지만 발표자가 연설문에 없던 내용을 연설 중간에 추가로 설명하거나 발표 직전까지 연설문 원고를 수정하는 바람에 연설문 최종 원고를 받지 못한 상태로 동시통역에 들어가는 일도 허다하다. 질의·응답 시간엔 돌발 질문이 나와 발표자가 흥분하는 등 돌발변수도 많다. 특히 소규모 세미나·포럼에선 아예 사전 원고가 없을 때도 적지 않다. 이렇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통역 부스엔 반드시 두 명의 통역사가 함께 들어간다. 20~30여 분 단위로 순번을 바꿔가며 동시통역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한 명이 통역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발표자 연설을 확인해 적절한 어휘와 표현을 찾아주며 통역을 보조한다. 통계·숫자 등 절대 틀리면 안되는 중요 수치도 재차 확인한다.

표정·감정까지 전달해야

 통역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통역을 단지 말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다. 직독직해처럼 어휘와 어휘를 연결해 문장만 완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통역사들은 “말을 옮기는 데 그쳐선 안되고 통역사가 의역·첨언 등을 하며 화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권 통역사는 “통역 전 발표자 발언이 담긴 유투브 동영상 등을 보며 발표자의 어투와 발언 속도는 물론 성향·성격까지 파악해야 한다”며 “좋은 통역은 발표자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발언자가 두서 없이 발언하더라도 통역자는 정제되고 완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발표자가 특정 사건·지명·인물을 거론한다면 청중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통역사가 첨언해 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화자가 강조하는 부분은 더 강하고 직설적 표현을 활용해 화자의 감정을 살려주고, 반대로 화자가 너무 격앙됐다면 좀 더 부드럽고 차분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때문에 통역사들이 동시통역할 때는 발언자의 표정과 청중 분위기를 직접 보고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행사장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에 통역부스를 설치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외교부에서 한러 통역을 담당하는 배선경(38·여) 사무관은 “양국 정상이 만나는 정상회담이나 경제통상협상 등 중요한 외교의 장에선 통역사의 조절자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을 예로 들었다. “당초 40분으로 예정됐던 회담이 2시간이나 이어졌어요. 양국 정상 사이에 속을 털어놓고 시원하게 얘기해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죠. 속내를 드러낸 두 정상이 2시간 동안 맞붙었다고 생각해봐요. 회담 내내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데 롤러코스터 탄 기분이었어요.” 이 회담에선 북핵문제와 러시아 연안에서의 명태조업 등 민감한 외교·경제 이슈가 다뤄졌다. 배 사무관은 박 대통령 의중을 읽고 강하게 어필해야 할 때는 단호한 어조로, 반대로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혀야 할 때는 차분하고 정돈된 표현으로 박 대통령의 발언을 옮겼다고 한다. 그는 “한 어휘, 한 문장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엔 관련 역사·회담·뉴스 등 수십 개의 팝업 창이 동시에 떠야 한다”며 “회담 분위기에 맞춰 우리 측 입장을 어떻게 녹여낼지 순간순간 계속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하는 직업, 지적 호기심이 중요

 통역사가 국제회의·세미나·포럼 등 행사 전반을 조망하며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해당 분야 전문가에 버금가는 배경 지식을 갖춰야 한다. 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이주연 교수는 “금융·조세 등 경제분야 세미나에선 업계에서만 통용되는 약어가 많이 쓰인다”며 “통역사는 청중 대부분이 전문가라도 혹시 모르는 한 명을 위해 약어를 쉽게 풀어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역사는 끊임없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며 “통역 의뢰를 맡으면 자료 준비와 조사, 연구에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 이상 시간을 들인다”고 덧붙였다. 국제회의라면 의제에 대한 충분한 자료조사는 기본이다. 통역사가 해당 분야 사전 지식을 갖고 제대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통역의 질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어능력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더 중요한 능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통역사는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한다. 문화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매끄러운 통역으로 예방하거나 해결한다. 생소하거나 어려운 표현을 통역할 때 익숙한 속담을 인용해서 설명을 곁들이는 식이다. 이 교수는 “직역보단 의역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며 “해당 언어권의 농담·풍습·속담 등 문화·역사에 대해 두루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변화를 읽고 신조어·유행어를 익히는 등 언어 실력이 뒤처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통역하는 언어권의 신문·잡지를 읽고 연예·스포츠·공연 등 문화 전반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 가야 한다.

 통역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 유리하다. 무대에서 통역하는 상황도 많아 대범함도 필요하다. 발표자 표정과 감정을 읽어내는 센스 등 민첩성과 순발력도 필수적이다.

다양한 분야로 진출

 현재 국내에선 통역사 자격증을 주는 국가고시는 없지만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면 업계에서 통역사 자격을 인정한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면 크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 대학이 운영하는 통역센터나 사설 통역 에이전시 회사에 등록하고 프리랜서 통역가로 뛰는 것이다. 둘째, 외국계기업·대기업·금융권 등 사기업에 통역사로 취직한다. 세번째는 외교부·안전행정부·통일부·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 정부기관에 통역 업무를 겸하는 공무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공기관·사기업에 들어가거나 반대로 기관·기업에서 나와 프리랜서가 되기도 한다.

 프리랜서는 보통 6시간 통역에 90만원 안팎을 받는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본인 실력에 따라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프리랜서 권상미 통역사는 “통역사가 많이 배출돼 경쟁이 심한 한영 통역에선 금융·정보통신(IT)·제약·의학·예술 등 특화된 전문 분야가 있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며 “통역이 필요한 국제 행사가 봄·가을에 몰려 있어 일년 내내 일감이 꾸준히 있지 않은 것도 어려운 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한국외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이 학교 통변역대학원 재학생들이 2층 통역부스 안에서 통역을 했다. [사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대표학과-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혹독한 교육과정 … 졸업 동시 현장 투입

1979년 설립한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이하 외대 통번역대학원)은 영어·불어·독일어·러시아어·서반아어·중국어·일본어·아랍어 8개 언어 과정의 전문 통번역사를 양성한다. 외대 통번역대학원 방교영 원장은 “세계 유수 통번역대학·대학원도 평균 5~6개 언어 과정만 운영한다”고 말했다. 개설 언어수만 많은 게 아니라 수준도 아시아 최고로 꼽힌다.

 외대 통번역대학원은 2004년 전 세계에서 프로그램과 교수진 실력을 인정받은 35개만 가입돼 있는 세계통번역대학·대학원(CIUTI) 협회에 아시아 최초로 가입했다. CIUTI는 유엔·유럽연합(EU) 등 국제기구 공식 협력기관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조직이다. 아직까지 국내에선 외대 통번역대학원만 가입돼있다. 방 원장은 “까다로운 CIUTI 가입평가를 통과할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라며 “재학생 중 30%는 외국 유학생일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번역사는 졸업장이 곧 자격증 역할을 한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을 정도의 훈련된 인원을 배출해야 하는 만큼 교육과정이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외대 통번역대학원은 8개 언어별로 국제회의통역·통번역 전공으로 나뉘고, 영어에 한해 번역 전공을 따로 두고 있다. 모든 전공은 매 학기 8 과목 안팎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순차·동시통역 훈련은 물론 통번역사에게 필수적인 문화콘텐트·산업경제·정치법률·과학기술·문학·인문사회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배경지식과 전문어휘를 익힌다. 이 학교 한영과 석사 1학년 김규리씨는 “수업마다 주제에 맞춰 방대한 자료조사를 하고 전문어휘 시험분량도 매주 수십 페이지에 달한다”며 “학교를 감옥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부를 정도로 학업량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모든 수업은 실전처럼 진행된다. 학생들은 조사해온 자료를 단순히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료 타당성에 대해 토론한 뒤 곧바로 순차·동시 통역 훈련자료로 활용한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통번역 기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다. 매주 열리는 주제특강에서도 ‘수업이 곧 실전’이라는 특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주제특강은 정치·경제·문화 등 이슈에 맞춰 외부 초빙강사가 강연하는 수업으로, 2학년 학생들이 특강의 동시통역에 투입된다.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실전과 동일한 환경에서 연 30여 차례의 동시통역 경험을 할 수 있다. 주제특강뿐 아니라 외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나 해외국빈급 인사의 방문 등에서도 통역 경험을 쌓는다.  

진로 전문가가 본 이 직업
실수 용납 안되는 프로의 세계

일반인이 만나기 힘든 세계의 오피니언 리더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고, 국가의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하기도 하는 통역사. 다양한 사람과 교감하며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게 이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프로의 세계가 있다. 외교·경제·의료 등 전문분야의 국제회의나 세미나 통역을 위해서는 어학 능력뿐 아니라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된다. 또 일(통역)의 성과가 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쉽게 도태된다.

 본인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한 마디 통역 실수가 외교·경제 분야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기에 한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통역분야에 대한 철저한 자료조사가 필요하고, 통역하는 순간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긴장과 스트레스, 체력 소모도 큰 편이다.

  IT 발달로 통·번역기 개발이 이뤄지면 통역사에 대한 수요가 줄 것이란 의견이 있다. 하지만 국제회의나 세미나 등 통역이 필요한 행사는 일상대화가 아니라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민감한 주제나 중요한 국가적 사안을 다루기 때문에 통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것이다.

 국내에 통역사가 늘면서 통역사끼리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영어의 경우 정치·경제·기술·의료 등 자기 분야를 전문화·세분화하는 추세다. 언어능력뿐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많고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다 적합한 직업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생애진로개발센터 책임연구원 강옥희

직업 관련 정보는 교육부 커리어넷(career.go.kr)과 고용노동부 워크넷(work.go.kr)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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