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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안전제일, 신나는 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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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처음엔 그냥 가치주 펀드랑 비슷한가 보다 하고 가입했어요. 그런데 2년도 안 돼서 수익률이 60%를 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경기도 분당에 사는 주부 이은정(45)씨는 최근 증권사 랩 어카운트(Wrap account) 상품에 투자해 재미를 봤다. 2012년 9월 가입 후 누적수익률이 62.5%를 기록 중이다. 5000만원이었던 원금은 8100만원으로 불었다. 이씨는 “랩 어카운트 하면 왠지 어렵고 복잡한 것 같아 고민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 됐다”며 웃었다. 그가 가입한 상품은 신영증권의 가치투자형 랩이다. 증권사가 자체적으로 고른 10개 내외의 중소형주를 장기보유한다. 가치주 펀드를 랩 형태로 옮겨 놓은 상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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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랩 어카운트는 증권사가 고객의 자산을 일임 받아 투자하는 상품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고객이 어떤 주식이나 펀드·채권을 살지 일일이 결정하지 않아도 투자성향에 따라 증권사가 알아서 굴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와 달리 한국에선 지난 몇 년간 ‘랩 어카운트=자문형 랩’이란 공식이 통용돼왔다. 자문형 랩은 투자자문사가 추천하는 10~20개 내외의 종목을 편입해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게 보통이다. 2010년 ‘차화정 랠리’가 한창일 때는 연 수익률이 100%가 넘는 자문형 랩도 있었다. 당시 자문형 랩에 돈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자문사들이 주로 담는 종목을 두고 ‘자문사 칠공주’·‘사대천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서울 강남의 증권사 PB들은 그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고객들이 줄 서서 ○○자문사 랩만 찾던 시절이었죠. 그 자문사 상품을 안 팔면 다른 증권사로 돈을 옮기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할 정도였다니까요.”

 하지만 그런 영광도 이제는 옛날 일이다. 오르기만 할 것 같던 코스피가 박스권에 갇히면서 자문형 랩은 한계를 드러냈다. 한국투자증권 신긍호 고객자산운용부 상무는 “자산배분에 신경쓰지 않고 소수 종목만 담는 자문형 랩은 상승장에선 강했지만 하락장에서는 벤치마크보다 더 큰 손실을 냈다”고 설명했다. 한때 10조원이 넘었던 자문형 랩의 덩치는 올해 3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랩, 주식 외에 ETF·ELS·채권에도 투자

 하지만 자문형 랩의 부진에도 랩 어카운트 전체 규모는 올해 들어 70조원에 육박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자문형 랩의 빈자리를 증권사들이 자체 운용하는 일임형 랩이 채우고 있어서다. 요즘 인기를 끄는 일임형 랩은 주가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박스권 속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두 가지 이상의 전략을 함께 쓴다. 그래서 ‘하이브리드 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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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정씨가 투자했던 신영증권의 가치투자형 랩이 대표적이다. 이 상품은 소수 종목을 보유하는 자문형 랩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성장주 대신 저평가된 종목을 골라 장기투자하는 가치투자 스타일을 접목했다. 덕분에 하락장에서도 손실이 크지 않다. 최근 3년 수익률은 120%가 넘는다. 입소문이 나면서 올해 들어서만 1000억원 가까운 돈이 몰렸다. 운용을 맡은 신영증권 김창연 고객자산운용부장은 “똑같은 가치투자 전략을 쓰더라도 공모 펀드는 운용에 규제가 많다. 예를 들어 한 종목을 10% 이상 담을 수 없고 공시 의무도 많다. 그러나 랩은 그런 규제가 없어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투자대상도 주식 외에 상장지수펀드(ETF)와 주가연계증권(ELS)·펀드·채권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요즘 랩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문구가 ‘플러스 알파’다. 큰 욕심 내지 않고 벤치마크나 은행금리보다 조금 더 수익을 내겠다는 뜻이다. KDB대우증권·신한금융투자·우리투자증권·삼성증권 등이 판매 중인 ETF 랩이 딱 그렇다. 세부 전략은 증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시스템 매매를 활용해 주가가 일정 이상으로 내려가면 ETF를 사고, 2000포인트를 넘어 상승하면 차익을 실현하거나 채권으로 옮겨 수익을 지킨다. 주가가 요즘처럼 박스권에 머무는 한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해도 조금씩 꾸준히 먹을 수 있는 전략이다. KDB대우증권 김분도 랩운용부장은 “증시 관련 20개 지표를 분석해 시스템 매매를 한다. 2011년에는 유럽재정위기 직전 주가하락 신호를 미리 감지해 손실을 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펀드를 묶어 랩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자산배분형 랩’은 세계 각지에 투자하는 3300여 개 공모 펀드 중에서 시장상황과 고객의 성향에 맞는 펀드를 골라 분산투자한다. 한국투자증권의 고배당주랩은 배당주 펀드를 랩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상품이다. 배당수익률이 연 4%가 넘는 종목을 골라 담는다.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는 “배당주는 보통 매년 2월과 6월에 조정을 받는데 이때 싼값에 담아놓으면 연 10% 정도의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문형 랩도 공격적인 운용스타일을 버리고 하이브리드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증권의 ‘자문형 ELS 랩’은 지난해 초 출시 이후 1년 반 만에 3500억원이 들어왔다. 가치투자로 유명한 VIP투자자문이 ELS 기초자산이 되는 종목을 고르고 삼성증권이 운용을 맡는 상품이다. 각 고객마다 5개 내외의 ELS에 분산투자해 연 8% 정도의 수익을 낸다. 삼성증권 문진철 랩운용팀 차장은 “ELS의 장점인 중위험·중수익을 살리면서 분산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좀 더 강화한 상품”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선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문 차장은 “2010년 자문형 랩에 쏠렸던 자금이 여러 자산에 투자하는 랩으로 분산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신긍호 상무는 “예전에는 주가가 꾸준히 상승할 거라는 기대가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오를 때와 내릴 때를 모두 대비하는 상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 발 늦었지만 금융상품도 시장의 변화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롱숏·메자닌 펀드에 DLS도 ‘하이브리드’

 실제로 하이브리드 상품의 인기는 재테크 시장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롱숏펀드가 대표적이다. 오를 종목을 사서 보유하는 ‘롱 온리(Long only)’ 전략 만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자 내릴 종목을 공매도 해 초과수익을 내는 펀드다. 채권과 주식을 섞은 펀드도 인기다. 지난 4월 출시된 분리과세 하이일드 펀드는 석 달 만에 5500억원을 끌어모았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의 채권(하이일드 채권)을 담는 동시에 자산의 일부를 공모주 청약에 투자해 기대수익률을 높인 상품이다.

 고액자산가들은 자산 배분차원에서 메자닌 펀드를 선호한다. 메자닌은 건물 층과 층 사이의 빈 공간을 뜻하는 건축용어다. 증권업계에선 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교환사채 등 채권과 주식의 성격이 섞여 있는 채권을 메자닌 상품이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 채권에서 나오는 이자수익이 보장되고, 주가가 오르면 주식으로 바꿔 수익을 낸다. KTB자산운용 선형렬 전략투자팀 이사는 “안정성을 중시하고 고수익보다는 ‘플러스 알파’를 원하는 자산가들이 주요 고객”이라고 말했다.

 파생결합증권(DLS) 시장에선 현물과 주가지수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DLS가 등장했다. 예를 들면 기초자산으로 금과 S&P500지수를 엮는 식이다. 동양증권 이중호 연구원은 “DLS의 기초자산으로 많이 쓰이는 원자재는 가격변동이 크다는 단점이 있는데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함께 설정하면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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