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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손잡고 동·서 냉전 마침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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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86년 셰바르드나제(오른쪽)와 고르바초프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는 모습. [중앙포토]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조지아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6세.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 조지아 총리는 이날 “고인은 냉전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모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날 성명을 내고 고인의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시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1985년 외교 문외한이던 셰바르드나제가 외무장관에 발탁되면서 시작됐다. 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미국과 역사적인 전략 핵무기 감축 협정을 이끌어 냈다. 유럽과 중국 국경에 배치됐던 군대를 철수하고 동·서독 통일을 지지하는 등 혁명적인 외교 정책을 단행했다.

 그는 “소련은 소련의 길을 갈 테니 너희는 너희의 길을 가라”며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에 기존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했다. 그가 창안한 외교 정책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곡 ‘마이웨이’에서 착안해 ‘시내트라 독트린’으로 불린다.

 셰바르드나제는 90년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주역이다. 당시 그는 북한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한국과의 수교를 반대했다. 하지만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면담을 거부하고 냉대하자 입장을 바꿨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초 한·소 양국은 91년 1월 1일로 수교일을 합의했으나 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최호중 당시 외무장관을 만나 협정 발효일을 고치고 직접 서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흰색 머리칼 때문에 ‘은색 여우’로 불린 셰바르드나제는 당시 개혁 정책의 건축가이자 대변인이며 협상가로 세계 곳곳을 누볐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를 세련되게 바꾸려고 궁리할 때 나는 이미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고 93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을 정도다. 80년대 말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막는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개혁가들은 숨었다. 독재가 오고 있다”고 경고한 뒤 장관직에서 사퇴했다.

 소련이 해체되자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온 그는 95년 조지아 대통령에 선출됐다. 2003년 11월 부패와 경제난이 촉발한 ‘장미혁명’으로 물러났다. 그의 장례식은 13일 치러지며 조지아 총리의 지시로 국가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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