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마지막 왕진의사 … 맘도 몸도 편한 가정진료 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2일 오후 권인순 교수(오른쪽)가 이지선 간호사와 함께 중증치매 할머니를 왕진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2일 오후 서울백병원 권인순(노인의학) 교수와 이지선 간호사가 왕진 길에 나섰다. 자동차로 10분 만에 서울 퇴계로 상가주택에 도착했다. 상가주택 5층 집안에 들어서자 중증치매 환자 이모(90) 할머니의 며느리 나모(51)씨가 맞는다. 할머니는 대화가 불가능하고 의식이 흐린 와상(臥牀) 환자다. 코 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소변 줄을 사용한다.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하다. 권 교수가 “할머니 어떠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상태를 살핀다. 이어 이 간호사가 혈압·산소포화도(혈액 속의 산소량)를 잰다. 정상 범위에 있다. 권 교수가 할머니 가슴에 청진기를 댄다. “천식기가 조금 있지만 별문제가 아니고, 열도 없네요”라고 진단한다. 피부를 살핀다. 한때 피부염이 심했는데 권 교수 권고에 따라 삶은 계란과 두유를 갈아 튜브로 공급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이 간호사가 소변 줄을 갈았다. 2주 전에 왔을 때처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붙이는 천식 약을 건네고 왕진을 마쳤다. 진찰·처치에 30분 넘게 걸렸다.

백병원 권인순 교수 몇 안 남은 왕진의

 할머니는 5년 전 와상 상태가 됐고, 2010년 3월부터 왕진서비스를 받는다. 권 교수는 대개 2주 단위로 할머니를 찾는다. 폐렴 등으로 항생제 주사를 맞을 일이 생기면 잠깐씩 입원한다. 대상포진·장염 등은 전화로 해결한다. 보호자 나씨는 “교수님이 왕진하니까 어머니를 집에서 모실 수 있다. 안 그러면 툭하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씨는 “밤에 갑자기 열이 나거나 토하거나 평상시와 다른 증세가 있으면 전화로 상의해 해결한다”며 “권 교수님이 어머니의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까 안심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국내에서 몇 안 남은 ‘왕진의사’다. 호스피스(말기 환자 종합 케어)를 위해 일부 의사가 왕진을 한다. 호스피스가 아닌, 일반 진료 형태의 왕진은 권 교수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 이후 122명을 왕진으로 돌봤다. 지금은 10여 명에게 간다. 주로 거동이 불가능한 암·중풍·치매 등 환자들이다.

수가 3만3800원, 늘릴수록 병원 적자

서울백병원 권인순 교수의 왕진가방⑧과 내용물. ①해열제·이뇨제 ②지혈제·강심제 ③수액 ④소독약 ⑤혈압기·청진기 ⑥알코올 솜 ⑦드레싱세트. 13년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다. [김경빈 기자]

 한국 의료는 병원 중심으로 이뤄진다. 왕진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간호사의 가정방문도 내리막길이다. 거동할 수 없어도 의사를 만나려면 병원에 와야 한다. 3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도 이런 광경이 벌어졌다. 앰뷸런스에 실려온 환자가 이동용 침대에 누워서 외래 진료를 받고 귀가했다. 왕진은 1989년 전(全) 국민 건강보험이 도입되고 의료기관이 급증하면서 줄기 시작했다. 별도의 왕진 수가가 없다. 왕진에 최소한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데도 병원 진료비와 같게 받게 돼 있다. 병원이 왕진을 할 이유가 없다. 권 교수는 한 번 왕진에 5만원을 받는데, 시간·인력·차량 등을 따지면 손해다. 병원과 의사의 특별한 결심이 필요하다.

 간호사가 시행하는 가정방문 간호도 줄고 있다. 병원 가정간호팀의 방문 서비스를 받은 환자는 2009년 2만6049명에서 지난해 2만3503명으로 줄었다. 의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며 수술 후 퇴원 환자 관리 등을 담당한다. 가정방문당 수가가 3만3800원(교통비 7700원 별도)밖에 안 돼 방문을 늘릴수록 적자를 보게 돼 있다. 장기요양보험의 방문간호 서비스도 줄고 있다. 대한간호협회 백찬기 홍보국장은 “가정간호를 원하는 환자는 느는데 수가가 맞지 않아 팀 운영을 중단하는 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만족도 높아 … 가정간호 원하는 환자 늘어

 가정진료의 장점은 많다. 퇴계로 할머니의 며느리 나씨는 “어머니가 가끔 병원 입원했다 집에 오면 표정이 편해지는 게 보인다”며 “병원이 아무리 좋은들 50년 살아온 집이 낫다”고 말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연구에 따르면 가정진료 환자의 사망률·합병증 등이 입원환자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와 가족의 만족도도 높게 나왔다.

 강명신 국립강릉원주대 치과대학 교수는 “가정진료를 받는 환자는 스트레스와 감염 위험이 적고 재입원하는 비율이 낮아 삶의 질이 좋아진다”며 “왕진 의사와 가정간호팀이 결합하면 더 효율적이 되고 여기에 원격진료가 도입되면 환자에게 편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손영래 보험급여과장은 “환자 인권 보호,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왕진을 활성화할 필요는 인정한다”며 “수가를 제대로 보전해 주면 왕진이 늘어 보험재정이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글=신성식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