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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소모적 기싸움 대신 산출 ‘공식’ 만드는 게 합리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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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호 24면

협상 시한 마지막 날, 동이 터 올 무렵에야 표결이 성사됐다. 그나마 경영계 대표 9명은 퇴장해 버렸다. 표결에 부쳐진 안건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만의 표시였다. 남은 노동계 대표 9명과 공익위원 9명만 표결에 참여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7.1% 올리기로 한 2015년 최저임금안은 27일 오전 이런 진통 끝에 나왔다.

해마다 6월이면 반복되는 최저임금 갈등, 그 대안은

올해 최저임금 논의 과정도 예년처럼 노사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는 ‘합의 방식 무용론’이 나오고 있다. 최저임금제 결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저임금법은 고용부 장관이 3월까지 최저임금 결정을 요청하면 최저임금위원회가 90일 이내에 심의·의결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위가 출범한 1988년부터 올해까지 28년 동안 법정 시한을 지킨 횟수는 2002~2008년과 올해, 이렇게 여덟 번뿐이다.

합의방식 무용론은 “최저임금은 저소득층 복지 차원의 문제이므로 노사가 거래하듯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는 데서 출발한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임금위원회 결정 방식은 많은 나라가 채택하고 있긴 하지만 상호 의견 절충이 안 돼 불협화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30년 가까이 노사가 기싸움의 장으로 활용해온 측면이 있어 진일보한 결정 방식 도입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도 “최저임금은 정책임금적 성격이 강한데 현재 위원회의 기능을 보면 교섭임금적 형태로 결정되고 있다”며 “여기에다 노사 대표자들이 권한과 권위를 충분히 위임받지 못한 한계 때문에 선명성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구도”라고 지적했다. 결과에 따라 사용자 대표는 기업들에, 노동계 대표는 노동조합들에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보니 ‘일단 세게 지르고 보자’는 식의 협상 전략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협상 태도도 정치적 과시용으로 변하기 십상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합의 방식을 대체할 방법으로 ‘법적 결정 방식’을 첫손에 꼽는다. 최저임금 상승률을 일정한 공식으로 만들어 매년 산출하자는 얘기다. 유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근로자 평균임금, 경제성장률, 물가 인상률, 취업률, 경제활동 참가율 등 다양한 변수를 조합해 경제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식을 노사 합의하에 만들어 두면 매년 되풀이되는 소모적인 논란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물가 상승률만 해도 소비자 물가, 생산자 물가 등 유사한 이름의 여러 다른 수치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변수들을 하나씩 합의해 가는 과정이 곧 제도를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에서 최저임금은 어떠어떠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데 대해 노사가 사회적 합의를 먼저 도출하고, 이 합의 정신을 담은 산출공식을 함께 만들어 내면 논란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유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한 번 만든 공식은 5년 정도 시행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문제점을 점검하고 수정안을 논의해 나가면 불신과 갈등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장려세제(EITC)와 ‘정책 패키지’ 차원에서 검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근로장려세제란 근로자가 속한 가구가 빈곤선 이하에 있는 경우 그 근로자에게 장려금을 줘 가구의 소득과 구매력을 높여 주는 일종의 ‘마이너스 택스(tax)’다. 최저임금제도가 개인의 임금 수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근로장려세제는 해당 근로자가 속한 가구가 빈곤층에 속하는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KDI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현재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 가운데 실제 빈곤계층에 속한 비중은 약 3분의 1이다. 최저임금이 빈곤층 지원의 기둥이 되기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유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분들이 모두 빈곤하다고 볼 수만은 없기 때문에 실제 빈곤층의 소득을 높이려면 한 가지 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제도와 근로장려세제는 비용 지출의 주체가 다르다. 최저임금은 기업이 부담하지만, 근로장려세제는 정부가 재정으로 지원한다. 유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을 하는데도 빈곤한 계층, 이른바 ‘워킹 푸어’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모두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국가가 책임을 분담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근로장려세제와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로장려세제는 고용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기업의 임금 부담이 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 경영계는 최저임금인상 반대 논리로 고용 불안을 꼽아 왔으나 근로장려세제를 확대하면 이러한 논란 없이 저소득층을 지원할 수 있다. 이장원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센터장은 “최저임금이라는 코뚜레만 잡고 끌어서는 소득 불평등 해소라는 수레가 끌려오지 않는다”며 “수레 바퀴도 갈아주고 수레에 얹혀진 짐도 나눈다는 차원에서 근로장려세제를 포함해 빈곤가구의 실질소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세청은 2009년 도입한 근로장려세제를 5년째 운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연소득 1700만원(최저생계비의 1.2배) 미만 근로자 가구 ▶18세 미만 자녀를 2명 이상 부양하는 가구 ▶무주택이고 일반재산 합계액이 1억원 미만인 가구 등의 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 소득 구간에 따라 월 80만원까지 근로장려금을 지급한다. 국세청은 적용 범위를 2015년부터 영세 자영업자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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