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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일제시대 ‘집장사 한옥’ 붐 … 진정한 한옥은 점차 밀려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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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호 10면

1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독립운동가 김대락 선생의 고택인 ‘백하구려’ㅁ자형 한옥.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2 1930년대부터 조성돼 700여 채 한옥이 있는 전주 한옥마을은 문화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다. 3 전주 한옥마을의 백련마을 고택 체험관. 조용철 기자

‘한옥은 포근하고, 화목하며, 감각적이고, 과학적이며, 신기한 집’(임석재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이라고 했다. 강렬한 한옥 예찬이다.

한국문화 대탐사 19 한옥 <상>

 하짓날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는 약 70도. 내리 꽂히는 햇살이 따갑다. 그러나 한옥의 깊은 처마는 차양처럼 이를 가려 그늘을 내준다. 겨울의 미지근한 태양도 처마는 잘 이용한다. 겨울이라도 공기는 햇살에 데워지는 법. 따듯해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다 깊은 처마에 걸려 머문다. 서까래도 그릇처럼 따듯한 공기를 모은다. 게다가 한옥의 방들은 대부분 깊지 않아 햇빛이 방 끝까지 들어온다. 잘 지은 한옥이라면 온돌 외에 별도의 냉난방이 필요 없다.

 그러나 양옥은 처마가 없다. 여름엔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집안이 한증탕이 되고 겨울이면 냉장고가 된다.

 한옥의 장점이 어디 그뿐일까. 세종 때 간행된 의학서 『구황찰요』는 ‘뜨끈한 구들은 병을 치료하는 데 요긴한 시설’이라고 했다. 온돌에 지지는 효과 때문이다. 온돌엔 운모가 사용되는데 조상들은 그중에서도 열 보존이 뛰어난 백운모를 썼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온돌은 방바닥을 뜨끈하게 데워 그 위에 등을 지지는 이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준다.

 한옥엔 통(通)의 원리도 들어 있다. 남동향 바람길이 그것이다. 여름 바람은 중문을 통과해 마당을 가로 질러 대청을 올라 방들을 휘감은 뒤 대청 뒷문을 거쳐 뒷동산으로 사라진다. 시원하다. 겨울에 대청 나무창을 닫으면 완전히 막혀 추운 북서풍의 길이 막힌다. 중문까지 닫으면 열기가 빠지는 길도 막힌다. 자연을 활용한 친환경 주거 형태답다. 한옥에 스민 조상들의 생태학적 지혜는 웰빙 열풍을 타고 새롭게 주목받는다.

 “우리 땅의 나무·흙·돌·풀 같은 우리의 것으로 지어진 한옥. 수명이 다하면 자연으로 환원되니 친환경적이다. 후덥지근한 한여름을 나는 공간으로 대청과 누마루만 한 게 없다. 매서운 한겨울의 온돌방.”(고영훈, ‘한옥에서의 여름나기’)

 한 건물에 냉·난방 기능이 갖춰진 한옥. 세계에 유례가 없다. “중국 건축은 웅장하고 일본 건물이 날카로운 맛을 낸다면, 한옥은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낸다.”(주남철 『한국의 목조건축』)

  “한옥 지붕은 낮에는 집안을 시원하게 하고 밤에는 따듯하게 한다. 처마는 계절에 따라 실내로 들어오는 햇볕의 양을 조절해 실내 환경을 쾌적하게 한다. 황토는 세균 번식이나 곰팡이의 번짐을 막아준다.”(박진준, ‘한옥 건축의 활성화 방안 연구’)

 지난 11일 전주 한옥마을. 1930년대부터 조성돼 현재 700여 채의 한옥이 있는 이곳은 문화관광 코스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여기저기 기존 한옥을 헐고 새로 짓는 현장이 보였다. 날렵한 맵시를 뽐내고 들어서는 새 집은 크고 웅장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안내를 해준 전북대 한옥건축기술종합센터 김윤상 팀장의 비판이 매섭다. “원래 민가는 큰 부재(기둥)를 못 썼다. 그런데 요즘 한옥은 너무 큰 것을 써 사찰이나 궁궐이 들어앉는 듯하다”고 했다. 옛날 한옥 한쪽에 서 있는 새 한옥의 마르지 않은 기둥을 보니 과연 우람했다. 한옥의 포근함과 자연스러움은 없고 옆 채(건물)와의 조화도 어색한 모습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니 허점이 꽤 눈에 띈다. 태조로에 지어진 3채의 쉼터. 쇠못을 쓰지 않는 한옥의 원칙을 어기고 기둥과 보는 판을 덧대 쇠못질을 했다. 겉은 목재지만 속은 철골이고 담장은 콘크리트, 시멘트 기와를 쓴 한옥이 태반이다. ‘이게 한옥이냐’며 정체성을 지적받는 이유다. 그렇게 300여 채 한옥 민가는 헐리고 정체불명의 상업화된 한옥이 들어섰다. 2010년 700여 채였던 주거형 한옥이 헐려 지금 상업용과 1대1 정도의 비율이 됐다. 입구에서 ‘한옥이 이렇게 번성하니 좋구나’ 했던 느낌은 한 시간쯤 뒤 출구에서 흐려져 버렸다.

 다음날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를 들렀다.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 선생의 집 ‘백하구려(白下舊廬)’. ㅁ자형으로 정면 8칸(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침), 옆면 5칸 크기인 아담한 한옥이다. 1885년 건축된 뒤 150년간 원형을 유지했다. 뒷산과 어울리게 나지막한 높이. 진한 갈색으로 변한 기둥·보·서까래가 세월의 연륜을 드러낸다. 훤히 트인 대청은 햇볕을 잘 받는다. 부뚜막의 구들도 옛 모습 그대로다. 후손 김시중(78)씨는 “문화재 지정을 받을 만큼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데 솔직히 겨울에 바람도 들어오고 불편하지만 견뎌낸다”고 말한다.

 지난 19일엔 서울의 북촌과 서촌을 들렀다. 그곳 한옥은 전주 한옥과 비슷하고 ‘백하구려’의 모습은 없다. 같은 한옥으로 불리는데도 왜 저리 다른가.

 한옥이란 단어는 1908년 『가사에 관한 소복문서』라는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시대에서 조선 말까지 양반 사대부 집을 ‘제(第)’ 혹은 ‘제택(第宅)’이라 했고, 일반 서민 집은 민가라 했다. 인구의 10% 정도가 사는 양반 집은 크고 멋있고 기와를 썼지만 고단한 민초들은 볏단을 덮은 초가집이나 너와집·굴피집 같은 곳에서 대부분 옹색하게 살았다.

 현대에 한옥이라 불리는 양반 집엔 조선의 성리학적 철학과 질서가 스며 있다. 태조 4년(1395) 상소가 올라왔다. “지금 신도(新都·한양)의 면적은 500여 결에 불과한데 정1품에게 60부(負·133㎡)를 주고 차차로 내려오면… 서민에게 줄 땅이 있겠습니까… 최고 40부를 넘지 않게 하면 각각 살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가대(家貸), 즉 땅 넓이 제한이다. 서민에겐 오늘날 80평 정도인 2부가 허락된다.

 이어 사치·허례를 막는 가사(家舍·건축 규모) 규제가 도입됐다. 세종 13년(1431) 대왕은 “서민 가옥은 공경(公卿)에 비기고 공경의 주택은 궁궐과 같아서 서로 다투어 사치와 화미(華美)를 숭상하니 실로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왕의) 친아들·친형제와 공주는 50간(間), 대군(大君)은 10간을 더하며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하고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할지며… 화공(花拱)과 진채·단청을 쓰지 말고 검소·간략한 기풍을 숭상하라…”고 했다.

 조선조를 일관한 집 철학이다. 물론 꼭 지켜지진 않고 한때 유명무실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둥의 길이가 세종 22년엔 7자였지만 세종 31년에는 10자 5치, 성종 9년에는 11자로 느는 식으로 사치스러워졌다. 그러나 정신은 남았다. 호화주택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정신은 500년 전 세종대왕의 어명에 뿌리가 닿아 있다.

 한옥엔 풍수사상, 자연사상 같은 것도 들어 있다. 집터론 임좌병향(任坐丙向·남남동)이 으뜸이며 그게 어려우면 주변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중심에 놓고 그 방향을 향해 짓는다. 정상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는 큰 인물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김영일 『한옥, 사람이 살고 세월이 머무는 곳』).

 창호지를 통해 바람소리, 처마 끝 낙수소리, 위뜨락 감나무의 까치소리, 앞마당 느티나무의 매미 소리 등의 자연음들을 내부공간으로 투영시켜 한층 더 자연과의 융합성을 느끼게 했다(주남철 『한국주택건축』). 한옥의 기본 단위는 5자인데 이는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다. 한옥의 모든 것을 우리 몸과 직결시켰다(신영훈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한옥』).

 한옥엔 그뿐 아니라 첨단기술도 들어 있다. 안 허리 곡선이라 불리며 ‘버선코’의 날렵함을 보여주는 들린 처마. 주로 ‘팔작 기와집’에서 나타나는 이 기술은 ‘선자서까래’라 불린다. 추녀를 중심으로 부챗살 모양으로 뻗으면서 기와지붕을 받치는 나무를 말하는데 영어로 캔틸레버 구조라고 한다. 전북대 김윤상 팀장은 “나무를 원뿔 형태로 가늘게 깎아 수렴시키는 기술인데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조선만 구사한 첨단기술”이라고 했다. 경상대 고영훈 교수는 “일본은 이 기술을 전수받았지만 이어지지 못했고 궁중 목수도 못 배웠다”고 말한다.

 한옥의 아름다운 500년 전통은 구한말 시련을 맞는다. 선문대 김명선 교수의 논문 ‘한말 지식인들의 재래주택에 대한 인식’에 따르면 한말 신문이나 학회지 등에 한옥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서양 주택에 비해 위생이 나쁘고 방한이 잘 안 되며 처마도 길고 창도 모자라다. 다층 한옥도 못 짓는다는 내용이다.

 한옥을 둘러싼 환경은 1920~30년 급변한다. 일본의 병참 기지화에 따른 군수산업 시설 건설, 조선 시가지 계획, 토지 구획사업 등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리며 주택난이 시작된다. 집장사들은 ‘찍어낸 한옥’을 팔기 시작했다. 주문 생산이었던 한옥이 사상 처음으로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개량 한옥이다.

 서울 북촌 마을의 한옥은 1920년대 후반부터 집장사들이 지었다. 그때까지 임야였던 현재의 삼청동 35번지, 가회동 1번지, 계동 2번지 일대가 대지로 전환되자 한옥 마을을 만든 것이다. 현재 가회동 31번지와 26번지 일대의 대형 필지다.

 시멘트 기와나 콘크리트, 붉은 벽돌, 유리 같은 비전통 재료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북대 김 팀장은 “일제 총독부가 목재 사용을 규제했고 전통 재료인 목재는 물·습기·벌레에 약해 그런 현상이 촉진됐다”고 말했다. 일본이 신봉한 시멘트가 한옥에 들어온 것이다.

 석굴암 보수에도 시멘트가 동원됐던 시기였다. 자연이 숨쉬던 한옥은 좁은 필지 속에 구겨졌다. 그럼에도 도시 한옥의 신주류로 등장했다. 전주의 한옥 마을을 비롯해 요즘 남은 수십 년 된 대도시의 한옥은 그렇게 시작돼 1960년대 초반까지 번성하다 양옥에 바통을 넘긴 것이다(조성진, ‘도시한옥의 주생활 양식 사례 조사연구’).

 오늘날 한옥의 입지는 위태롭다. 서울 북촌의 경우 2001년 조사 때 집 상태가 양호 28.2%, 보통 45.8%, 불량 25.1%였다가 2005년 조사에선 양호 42.7%, 보통 29.7%로 나타났다. 집 상태가 좋아졌다곤 해도 한옥은 사라지고 있다. 집장사 한옥이라 해도 1985년 2756동 건물 중 55.1%인 1518동이 한옥이었지만 2005년에는 40%가 사라지고 912동만 남았다.

 주인만 탓할 순 없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집장사 한옥의 문제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만 한옥일 뿐 속은 현대식으로 바꾼 ‘무늬만 한옥’이 나타났다. 북촌 한옥에 사는 S씨는 “여름엔 더위, 겨울엔 추위를 피해 온 가족이 지하에서 지낸다”고 했다. 전주도 마찬가지다. 워낙 전통한옥이 많은 안동시 같은 경우는 ‘30년대 한옥’은 무너져도 손도 안 대고 방치한다.

 요즘 건축계엔 한옥 정체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양 근대건축의 유입,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옥의 맥이 단절되고 전통과 서양 형식이 혼재하면서 ‘무엇이 한옥이냐’는 의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용어도 한옥, 도시한옥, 개량한옥, 신한옥이 난립한다. 김 팀장은 “한옥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표준도 없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도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국토해양부는 ‘한옥이란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한식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건축물을 말한다”로 정의한다. 그러나 전주시는 “한식기와를 사용한 지붕과 목조기둥을 심벽으로 한 목구조의 전통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과 대문, 담장 등을 총체적으로 칭한다”라고 규정한다. 지붕의 소재를 기와로만 한정한 것이다. 20여 개 지자체 중 서울시·전라남도·경상남도·경북 고령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의미의 한옥은 무엇일까. ‘아주 먼 조상 때부터 우리 고유의 기술과 양식으로 지은 집’을 한옥이라 말한다면 초가집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아파트도 한옥이 되는가. 한옥의 정의와 상관없이 한옥은 꾸준히 들어선다. 정부와 지자체의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한옥마을은 커지고 한옥호텔, 한옥도서관, 한옥주민센터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한옥은 현재 진화 중인가 아니면 혼란 속에 표류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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