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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 “저우언라이, 통치자감 못되지만 훌륭한 재상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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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호 29면

쑹메이링의 오빠 쑹즈원(가운데 지팡이 짚고 있는 장제스 뒷 편의 선글라스 착용한 인물)은 대륙 시절 장쉐량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1963년 2월 함께 군사훈련을 참관하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초청으로 타이완을 방문했지만 연금 중인 장쉐량을 면회한 후 일정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 김명호]

10여 년 전, 타이베이에서 우리나라 정승화 장군의 회고록을 발간한 적이 있다. 『12월 12일 장군의 밤(12·12 將軍之夜)』, 제목도 그럴듯했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 관한 새 책이 나왔다며 펼쳐 들었다가 ‘에이’ 하며 제자리에 놓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79>

엄청난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혀진다. 세월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이 원래 망각의 동물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1936년 12월12일의 시안사변(西安事變)은 예외다. 흔히들 중국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라고 하지만 그런 사건은 한둘이 아니다. 2년만 지나면 80년, 잊혀질 때도 됐지만 뒷얘기가 그칠 날이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976년 새해 벽두, 임종을 앞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장쉐량을 입에 올렸다. “성이 張씨인 옛 친구가 그립다. 40년 전 시안에서 헤어진 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살아있다면 지금 76세, 고맙고 미안하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비슷한 말을 평생 반복했다. 남 칭찬에 인색했던 대서법가 위여우런(于右任·우우임)도 청사(靑史)에 빛날 장쉐량의 행적들이 한줌의 재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파도를 대할 때마다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만리강산을 술 한잔 털어 넣듯이 한 사람”이라며 연금 중인 장쉐량을 노래했다.

몇 년 전 중국 TV에서 품위 있는 노부인이 한 말을 부정하는 중국인은 없다. 우리에겐 워낙 낯선 사람이라 이름은 생략한다. 기억에 의존해 인용한다.

연금 시절 모처럼 주어진 외출을 즐기는 장쉐량(오른쪽). 1959년 10월 타이완 남부 가오슝(高雄) 교외. 장쉐량의 셔츠는 쑹메이링이 미국에서 사와 선물한 것이다. 바지 속으로 넣지 말라는 쑹메이링의 말에 따라 셔츠를 겉으로 빼 입고 있다.

“허구한 날 모였다 하면, 시안사변을 얘기한 지 75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도 잊혀지고, 숨겨졌던 이야기들도 밝혀지기 마련이다. 시안사변은 이미 중국인들에게 영원한 얘깃거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시안사변 1년 뒤인 1937년 이후 12월 12일만 되면 새로운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를 거듭할수록 재미있는 내용 투성이다. 워낙 괴상한 사람들이라 공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다 보니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기는커녕 가공이 사실을 압도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기상천외한 얘기들이 나올지 아무도 예측 못한다.”

쑹메이링과 장쉐량에 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쑹메이링은 미모는 아니었다. 지혜와 총명함이 돋보였던 이 여인은 장쉐량의 불 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장쉐량은 한번 결심하면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장쉐량에게 감금당한 남편 장제스를 구하고, 11년 전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장쉐량의 안전을 지켜줄 사람은 중국 천지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확인이 불가능한 증언도 많다. “쑹메이링이 시안에 도착한 날 밤, 장쉐량의 집무실에서 두 사람이 부둥켜 안고 흐느끼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도 했다. 그뿐 아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연인들은 표가 난다. 무장 경호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수도 난징(南京)에 온 장쉐량 부부를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직접 역에 나가 영접했다. 장쉐량을 바라보는 쑹메이링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산책하는 모습을 얼핏 본 적이 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도 않았지만 다정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탕을 건네는 표정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너무 젊었다. 별것 아닌 행동도 콧김을 주고받은 사이는 다르다는 것을 모를 나이였다.”

쑹메이링의 눈에 비친 장쉐량은 독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장쉐량은 근거지 동북이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간 즐기던 아편과 모르핀을 끊어 버렸다. 부관에게 권총을 건네며 내가 다시 아편을 손에 대면 나를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일주일 만에 효과를 보자 전화로 온갖 자랑을 해댔다. 축하한다며 사탕과 초콜릿을 선물하자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여자들의 구애 편지가 하루에 100통에서 200통은 된다며 무솔리니의 딸이 제일 맘에 든다고 할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비행기도 직접 조종하고 자동차도 제 손으로 몰 때가 많았다.”

장쉐량과 저우언라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동안 미궁이었다. 1991년 자유를 회복한 장쉐량이 그를 간단히 언급했다. “내가 만나본 저우언라이는 최고 통치자 감은 못됐다. 훌륭한 재상 감이었다.”

1936년 1월 “옌안(延安)에 웅크린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장제스의 재촉에 시달리던 장쉐량은 리커눙(李克農·이극농. 훗날 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제네바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중공의 정보총책)의 주선으로 저우언라이와 처음 만났다. 장소는 옌안 인근의 허물어진 교회당이었다. 비행기를 직접 몰고 도착한 장쉐량은 미리 와 있던 동북군 지휘관에게 지시했다. “무장병력을 동원해 교회당 주변을 에워싸라. 100m 안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해라. 상대가 누구건 상관없다.”

저우언라이를 기다리던 장쉐량은 10대 후반 톈진(天津) 시절이 떠올랐다.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에 입학을 앞둔 장쉐량은 연극광이었다. 여자 배우로 분장해 인기를 끌던 저우언라이의 공연을 보며 박수 보낸 적이 엊그제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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