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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퇴직자 노리는 '하이에나' 경계령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고객님 당황하셨죠. 저도 당황했어요.” 요즘 금융사기를 패러디한 TV오락프로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사기꾼 일당이 던진 멘트다. 큰 웃음을 끌어내면서 유행어가 됐지만, 개그의 소재가 될 만큼 금융사기는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기꾼들은 보통 미취업자나 고령자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돈을 뜯어낸다. 한 순간에 알토란 같은 재산을 날린 피해자는 원통함으로 속병까지 얻어 눈물과 한숨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된다. 특히 나이 든 퇴직자가 금융사기를 당하면 만회할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50~60대 4명 중 1명이 금융사기 피해 입어

노후자금을 노리는 금융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고령자와 은퇴자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이 전국 만 24~64세 253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21%가 금융사기와 관련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50대와 60대 가운데 금융사기 관련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각각 25.4, 25.0%로 나타나 20대에 비해 1.5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50~60대 넷 중 한 명이 금융사기 대상이었던 셈이다. 또한 금융사기 피해자들이 입은 손실액은 평균 3825만원이었지만 60대의 피해금액은 평균 8250만원으로 전체 평균의 2.15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사기를 칠까. 의외로 낯선 사람보다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더 많이 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에게 금융사기를 치거나 치려고 했던 주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56.2%로 절반 이상이었고 친구 23%, 직장동료 20.8%, 학교동창 11.9%, 친척 8.9% 순으로 많았다. 그러나 실제 금융사기를 당했다는 응답자만 보면 아는 사람에게 당한 비율이 75.6%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당했다는 비율 42.2%를 상회했다.

누가 사기를 당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공기관 퇴직자가 사기를 당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공공기관에서 ‘갑’의 위치에 있다가 퇴직하게 되면 세상 물정에 어둡기 때문에 사기꾼의 꼬임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퇴직자 사기의 1순위 대상자는 군인이고, 2위는 교사, 3위는 경찰 출신, 4위는 시·군 공무원이라는 설문조사도 있다. 공공기관 퇴직자 중 생소한 분야에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야생 초원에 가게 된 동물원의 호랑이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은퇴는 두려움·불안함·외로움 등으로 다가온다. 은퇴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자유·행복·만족이라는 선진국 국민들과 한참 다르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는 원인은 우리나라 사람이 상대적으로 노후준비가 제대로 안된 탓이 가장 크다.

그래서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거나 막 퇴직한 경우 대개 조급증이 밀려든다. 인생 2모작을 위해 뭐라도 하겠다고 서두르는 경향이 강하다. 퇴직 후 고정 수입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영업이나 투자로 방향을 잡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으면서도 고수익을 추구하며 ‘한방’을 노린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들의 은퇴 실태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성의 실질 은퇴연령이 71.1세로 멕시코에 이어 OECD 회원국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퇴직 후에도 부실한 노후 대비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실질 은퇴연령이란 어떤 식이든 돈을 받는 일을 완전히 그만둬 경제활동에서 물러나는 나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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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급함에 밀려 시작한 일이 잘 될 리 없다. 돈이란 불안정한 삶 속에선 싹을 틔우지 않는다. 오히려 자칫하다간 퇴직금은 물론 안 쓰고 한 푼 두 푼 모은 쌈짓돈까지 날려버릴 수 있다. 금융회사에서 퇴직한 이모(58·서울 개포동)씨는 지난해 초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았다. 자신이 짓고 있는 경기도 안산의 쇼핑몰에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쇼핑몰이 완공되면 한 개 동을 지분으로 준다는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이거면 충분히 노후 보장이 된다는 미끼도 흘렸다.

이씨는 결국 퇴직금과 함께 거주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모두 11억원을 투자했다. 부인과 친구 등 주위에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쇼핑몰은 분양이 제대로 안됐다. 돈줄에 쫓긴 친척은 사채를 얻어 써야 했고, 빚 독촉에 시달린 끝에 쇼핑몰 전체 지분을 사채업자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씨가 임대료 수입을 꿈꾸던 쇼핑 몰 한 개 동도 사채업자의 소유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친척을 원망하면서 소송까지 벌였지만 허사였다.

퇴직자의 주변엔 늘 하이에나들이 서성거린다. 사기꾼을 비롯해 은퇴 조급증을 이용하려는 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하이에나도 있다. 나이 들수록 의심하는 마음이 약해지면서 팔랑 귀가 된다. 외로움도 많이 탄다. 누군가가 살갑게 접근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여기에 고집, 좋게 이야기 해서 자기확신까지 강해져 어지간해선 주의의 충고나 만류가 먹혀 들지 않는다.

일단 하이에나에 걸려들어 재산을 털리고 나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건 순식간이다. 그럼, 그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십 % 이상 수익을 올려주겠다는 감언이설은 일단 의심부터 해봐야 한다. 지나치게 높은 수익률의 투자권유를 받는 경우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하라”며 단호하게 관심이 없음을 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결정 단계에서는 금융 당국이나 금융회사의 관련 자료나 정보를 통해 투자의 합법성을 확인하고 모든 계약 내용은 반드시 문서화해 놓는 게 필요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들쑤셔대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식의 충동질을 해대며 정신을 쏙 빼놓으려 한다면 그건 마감 효과를 노린 하이에나로 보면 된다, 만약 하이에나의 유혹에 판단이 흐려진다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친구나 식구들과 의논하도록 하자. 퇴직자에겐 하이에나의 집요한 공세를 여하히 물리치느냐가 안정된 노후생활로 넘어가는 첫 관문이다.

서명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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