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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맡아 달라" "노인 같다 … 정치선배 어떠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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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이 19일 시청 집무실을 방문한 정몽준 전 의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박원순(58) 서울시장과 정몽준(63) 전 새누리당 의원이 만났다. 6·4 지방선거 승자와 패자의 만남이다. 패자가 승자를 찾아왔다. 19일 오전 서울시청 집무실. 박 시장이 입구에 나와 “아이고 아이고, 고생하셨다”며 정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정 전 의원도 “축하한다”고 답례했다.

 ▶박=“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 쉬셔서인지.”

 ▶정=“제 얼굴이 좋잖아요. 서울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니 잘해 주실 거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부탁드리러 왔다.”

 ▶박=“시민의 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공약도 하셨으니까 제가 늘 말씀을 잘 경청하는 고문(顧問)으로 모시겠다.”

 ▶정=“저한테 전화를 주셨는데, 이름이 안 뜨는 전화는 다 못 받는다. 혹시 앞으로 용건이 있으시면 문자를 보내주시면 바로 연락드리겠다.”

 ▶박=“핫라인을 하나 만들자. 고문직은 수락하시는 거죠?”

 ▶정=“고문이 아니고 자원봉사를 제가 하겠다. 고문은 너무 노인 같으니 제가 연배가 위인데 정치선배가 어떠냐.”

 ▶박=“그거 좋은 생각이다.”

 ▶정=“저는 후배라고 안 부르고, ‘박 시장님’ 할게요.”

 ▶박=“원래 선거기간 중에 서로 좀 그런 일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터 친했다. 오늘부터 다시 선후배로 돌아가는 걸로 하고 일상적으로 제가 말씀 듣겠다.”

 이에 정 전 의원은 “(박 시장이) 경제문제를 시장에 다 맡길 수 없다고 한 건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시장경제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충고했다. “(박 시장이)‘시장경제는 효율성이 있다’, 이렇게 말씀만 하셔도 경제가 잘 굴러갈 것”이라고도 했다.

 박 시장은 “제가 시장에 자주 간다”는 농담으로 응했다. “전 뭐든지 합리적·균형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가 부족한 게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했다.

 정 전 의원은 “시장경제는 수단이니 잘 활용하시면 되고 거기 얽매일 필요는 없다”며 “대신 시장경제를 너무 배척하고 공공기관과 정부가 전부 하겠다고 하면 그건 정부 실패가 클 수 있으니 잘 활용하시라”고 덧붙였다. 박 시장은 “구체적인 방법과 정책은 언제든지 핫라인을 만들겠다 했으니 연락 달라”고 답했다.

 두 사람은 10여 분간 환담을 나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대치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만난 건 박 시장이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정 전 의원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은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정 전 의원에 대해 박 시장은 “한국 사회는 좁고 같이 살아갈 사이니 다시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를 전해 들은 정 전 의원이 박 시장 측에 만남을 요청했다고 한다.

 선거 때 날카롭게 대립했던 두 후보가 선거가 끝난 뒤 만나 덕담을 주고받고, 패자가 승자에게 정책 방향에 대한 조언까지 했다. 한국 정치에서 극히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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