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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왕의 몰락 … 디펜딩 챔프 스페인 1호 탈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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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2010 남아공 월드컵 챔피언인 스페인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안드레아스 이니에스타가 19일(한국시간) 칠레와의 경기 도중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로이터=뉴스1]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비센테 델 보스케(64) 스페인 감독은 넋이 반쯤 빠진 사람 같았다. 19일(한국시간) 스페인은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B조 2차전에서 칠레에 0-2로 패했다. 네덜란드전 1-5 대패에 이은 2연패로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먼저 탈락이 확정되는 수모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스페인에서는 새 국왕인 펠리페 6세(46)가 즉위하는 날이었다. 외신들은 “왕은 죽었다” “파티는 끝났다” “스페인의 시대가 저물었다”며 ‘디펜딩 챔피언’의 탈락을 전했다.

 델 보스케 감독은 네덜란드전에서 부진했던 사비 에르난데스(34)와 제라르 피케(27·이상 바르셀로나)를 선발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스페인은 전반 20분 에두아르도 바르가스(25·발렌시아)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네덜란드에 5골이나 내주고도 재신임을 받은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33·레알 마드리드)가 이번에도 중심을 잃고 무너져 쉽게 골을 내줬다. 스페인은 전반 43분에 찰스 아랑기스(25·인테르나시오날)에게 추가골을 얻어맞았다. 카시야스의 펀칭이 아랑기스의 발 앞에 떨어지며 실점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골키퍼 카시야스는 칠레전에서도 펀칭 실수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 로이터=뉴스1]

 기자회견장에 들어온 델 보스케 감독은 “월드컵에서는 무슨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스페인이 탈락할 줄은 몰랐다. 슬프다. 스페인 축구는 나를 포함해 변화가 필요하다”며 거의 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비가 잘못된 것 아닌가”란 질타가 이어지자 델 보스케 감독은 “답하고 싶지 않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25일 동안 착실히 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고 말하더니 돌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델 보스케 감독의 인자한 성격을 잘 아는 스페인 기자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마라카낭에 모인 칠레 팬은 과도할 정도로 전투적이고 열정적이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일부 칠레 팬은 펜스를 무너트리고 경기장에 난입하다 경찰에 제압당했다. 디에고 코스타(26·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싫어하는 브라질 팬까지 칠레 응원에 가세했다. 코스타는 브라질 출신이지만 귀화해 스페인 유니폼을 입었다. 브라질 팬은 우승 경쟁자로 꼽혔던 스페인의 몰락을 즐겼다.

 축구에 영원한 강팀은 없다. 월드컵 84년 역사상 디펜딩 챔피언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건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다. 2006 독일 대회 챔피언 이탈리아는 2010년 남아공에서 망신을 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레블뢰 군단’은 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이어 유로 2000과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제패했지만 2002년에는 무득점 1무2패에 그쳤다. 반대로 두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건 이탈리아(1934년·38년)와 브라질(58·62년) 뿐이다.

 한때 가장 혁신적이었던 티키타카(탁구 치듯 짧고 빠른 패스 플레이)도 이젠 낡은 전술이 됐다. 상대는 그 리듬과 흐름에 익숙해져 스페인의 숏패스에 예전처럼 허둥대지 않는다. 도리어 과감하고 정확한 롱패스로 티키타카의 허점을 단숨에 파고들었다.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서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맞대결한 것도 스페인 대표팀에는 부담이 됐다. 피로를 회복하고 함께 훈련할 시간이 부족했다. 2002년에도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를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이 떨어지며 부상을 당했다.

 유로 2012에서 제로톱(최전방 공격수를 두지 않는 전술)으로 정상을 지킨 델 보스케 감독은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에 0-3으로 패한 뒤 “이젠 우리가 도전자”라며 또 한 번의 변신을 감행했다. 전형적인 원톱 공격수인 코스타의 귀화가 그의 묘책이었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며 팀 안팎이 시끄러웠고, 티키타카 전술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 전술은 낡았고, 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주축은 노쇠한 가운데 새 피의 수혈은 실패했다.

 AP의 세인트 호르헤 기자는 “델 보스케 감독은 기존 선수들에서 크게 변화를 주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꼬집으면서도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은 최근 유럽선수권에서 2연패에 성공했다. 미래는 어둡지 않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호주 꺾고 16강 확정=한편 네덜란드는 호주와의 B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3-2로 이기고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로빈 판페르시(31·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날 네덜란드의 두 번째 골을 넣으며 득점 공동선두(3골)로 올라섰다.

리우데자네이루=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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