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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이원복 만화가·덕성여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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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효정 기자]

파소(婆蘇)의 매[鷹]는 파소가 산(山)에 간 지 이듬해의 가을 날, 그 아버지에게 두 번째의 편지를 그 발에 날라왔다. 이번 것은 새의 피가 아니라, 향(香)풀의 진액을 이겨, 역시 손가락에 묻혀 적은 거였다.

- 미당 서정주(1915~2000) ‘파소 두 번째의 편지 단편’ 중에서

파소(婆蘇) 또는 사소(娑蘇) 부인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데 처녀임신으로 부왕으로부터 내쳐진 뒤 계림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박혁거세를 낳는다. 처음에는 부왕에 대한 원한과 서러움이 증오가 되어 새의 피로 그 한 품은 마음을 편지에 썼으나, 핏덩이 아기를 기르면서 순화된 그녀는 부왕을 용서하고 향내 나는 풀의 진액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생명, 자연,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적는다.

 대학 시절, 나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다 못한 자형이 퇴거를 명한 적이 있다. 조실부모한 일곱 남매의 막내인 나를 큰누님이 거두셨는데 만화 그린다고 밤낮을 뒤바꾸어 사는 어린 처남을 엄한 자형께서 쫓아내신 것이다. 그때 철모르던 나는 자형께 야속하고 분한 마음으로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던 즈음, 시 낭송의 대가였던 고(故) 김수남(金秀男) 소년한국일보 사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앞에 놓고 읊어주던 시가 바로 이 시였다. 그 후로도 세상에 울적하거나 한스러운 일이 있으면 이 시의 낭송을 부탁하였고, 그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지며 그 어떤 울분과 미움도 봄눈처럼 녹는 위대한 시의 힘을 느낀다.

 내가 평생을 살면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언제나 원한과 증오에 찬 피보다 용서와 화해의 향기로운 풀의 진액으로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게 된 건 이 시 덕이다.

이원복 만화가·덕성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