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잡스 떠나니 베저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제프 베저스(왼쪽) 아마존 CEO가 18일 미국 시애틀에서 스마트폰 ‘파이어폰’을 공개했다. 본지는 베저스와 2010년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아이폰 4’를 공개했을 때 모습을 합성했다. [시애틀 AP=뉴시스, 중앙포토]

천재가 떠난 시장에 혁신가가 뛰어들었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저스가 18일(현지시간) 파이어폰을 공개했다. 고인이 된 천재 기업가 스티브 잡스의 잔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스마트폰 시장에 당대 최고의 혁신 기업가 베저스가 진출한 것이다.

이날 시애틀 행사장에서 베저스의 제품 소개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수년간 사람들은 언제 아마존 스마트폰이 나오는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더 나은 휴대전화를 만들 수 있을까’였다. 이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꼬박 1시간 동안 제품을 설명한 청바지 차림의 베저스는 잡스를 연상케 했다. 잡스의 천재성은 ‘연결(connection)’이다. 그는 떨어져 있던 휴대전화 사용자와 앱 개발자를 연결시켰다. 그럼으로써 거대한 IT 생태계를 창조했다. 베저스도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한 듯 보인다. 파이어폰은 사용자와 세계 최대의 온라인 마켓을 연결시킨다. 파이어폰에 탑재된 3D(3차원) 화면과 시청각 인식 프로그램인 ‘파이어플라이’는 그 같은 온라인-오프라인 연결을 최적화하는 수단이다. 3D 화면은 ‘다이내믹 퍼스펙티브(Dynamic Perspective)’라는 기술로 실현됐다. 휴대전화 앞면에 있는 4개의 특수 카메라가 사용자의 머리 위치를 추적해서 입체적 화면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3D가 차세대 디지털 기기의 총아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마트폰에서 구현된 것은 파이어폰이 처음이다. 파이어플라이는 사용자가 보고, 듣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이다. 상품, QR코드, 음악, TV프로그램 등 1억 개 이상을 인식할 수 있다. 어떤 물건인지 파악하고(파이어플라이), 입체적 모습을 미리 파악하는 것(3D 화면)은 휴대전화로 온라인 쇼핑을 원하는 사용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능들이다. 사용자들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물건을 선택하면 아마존에 원스톱으로 주문이 이뤄진다. 무제한 클라우드 사진 스토리지도 사용자들이 편리하게 느낄 요소다. 사진을 찍으면 자동으로 클라우드 드라이브에 저장되고, 용량은 무제한이다.

 잡스는 연구실에 갇힌 천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고, 그것은 마케팅에 대한 천부적 감각으로 발휘됐다. 하지만 마케팅에선 베저스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아마존의 공격적 비용 인하는 경쟁업체를 고사시켰다. 이베이가 선점하고 있던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이베이가 기피했던 배달망을 효율적으로 구축해 이베이를 꺾었다. 베저스는 7월 하순 시작될 파이어폰 판매를 미국 내 2위인 AT&T와 단독 제휴했다. 2007년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개발했을 때 AT&T에만 판매를 맡겼던 것과 빼닮은 마케팅이다. 사실 베저스에겐 스마트폰 시장 진출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베저스의 성공을 가져온 PC 시대는 저물고 있고, 사람들은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다. 아마존 매출 중 PC 비중은 2013년 55%에서 1년 사이 42%로 떨어졌다. 반면 스마트폰에 의한 거래는 32%로 동일했다. 스마트폰이 매개가 되는 온라인 쇼핑 생태계가 절실했던 것이다.

 베저스의 도전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이미 스마트폰 시장은 포화상태다. 시장엔 삼성과 애플이라는 절대 강자가 있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올 1분기 삼성과 애플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6%다. 고객 대부분은 2년 약정이란 족쇄에 묶여 있다. 새로운 수요 대부분은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서 나온다. 그러나 파이어폰은 당분간 미국에서만 팔린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삼성·애플과는 다르게 오픈 마켓에서부터 음원, 클라우드 저장까지 아마존의 생태계와 휴대전화가 마치 한 몸처럼 통합돼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포레스터 리서치의 애널리스트 줄리 애스크는 블룸버그통신에 “흥미롭긴 하지만 3~4년 전에 우리가 몰랐던 기능은 없다. 아마존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고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파이어폰의 미국 판매 가격은 2년 약정 기준 32기가바이트(GB) 모델이 199달러(약 20만3000원), 64GB 모델이 299달러(약 30만4500원)로 갤럭시 S5, 아이폰 5S와 비슷한 수준이다. 시장은 일단 호의적이다. 이날 아마존 주가는 2.69% 올랐다. 과연 혁신가 베저스가 천재 잡스를 넘어설 수 있을까? 답은 시장이 쥐고 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김영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