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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 28도 '얼음공주' … 23번 수술 끝에 다시 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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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몇 시간을 외쳤어요. 누군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 다시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정신을 잃었어요. 그게 마지막 기억이에요.”

 지난 2월 17일 부산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진행되던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이 무너졌다. 건물 잔해에 깔려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연우(미얀마어과·19)양은 사고 발생 3시간15분 만인 다음 날 0시20분에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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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우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무너진 쇠기둥이 연우의 하반신을 모조리 할퀴었다. 골반뼈가 으스러지고 허벅지 뼈는 부러져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조각난 뼈들이 주변의 살을 찢는 바람에 출혈이 심했다. 해발 500m 고도 산기슭의 눈밭에서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연우의 등과 다리 뒷편은 쌓인 눈과 함께 얼어갔다.

 울산대병원 경규혁(38) 외상외과 교수는 사고 직후인 오후 10시40분 현장에 도착했다. 응급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를 분류하는 게 첫째 임무였다. 밤 0시30분, 연우가 진료소에 도착했다. 반(半)얼음 상태였다. 계속된 출혈로 의식을 잃었고 숨을 거의 쉬지 않았다. 몸이 꽁꽁 얼어 혈압과 체온이 안 잡혔다. 기계의 측정범위(최저혈압 50~60㎜Hg, 체온 28도 이상)에 들지 않았다. 연우는 곧바로 권역외상센터가 있는 울산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경 교수는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구급차 안에서 연우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혈관을 확보해 수액을 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얼음 상태가 된 연우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착 즉시 수술에 들어갈 수 있게 병원에 비상을 걸었다.

 병원에 오자마자 온풍기·침대장판이 동원됐다. 연우의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다. 체온이 오르자 피가 녹으면서 출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울산으로 오던 중이던 연우의 어머니 이정연(53)씨에게 경 교수가 전화를 걸었다. “사인 없이 수술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수술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목놓아 울었다.

 수술실에서 혈관외과 박호종 교수가 메스를 잡았다. 연우의 배를 열어 골반뼈 출혈을 막았다. 연우의 심장이 잠시 멎었다. 급히 심폐소생술을 했다. 정형외과 정광환 교수가 골반과 허벅지 뼈를 고정하는 수술을 했다. 배에 고인 피를 닦아내는 등 마무리 수술은 경 교수가 맡았다. 7시간에 걸친 수술이었다.

 누구도 연우가 살아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인공호흡기로 최대치의 산소를 공급했지만 호흡과 혈압이 불안정했다. 수술 후 4시간이 지났을까, 연우가 가늘게 눈을 떴다. 사고 후 17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온 거였다. 그것도 잠깐, 연우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생사를 건 싸움은 계속됐다. 사고 3일이 지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혈압과 호흡이 안정됐다. “엄마 미안해.” 연우의 첫마디였다.

 다음 날 2차 수술이 진행됐다. 죽은 피부와 조직을 제거하고 이식했다. 경 교수는 괴사(피부나 조직이 죽는 것)가 진행된 상태로 패혈증(균에 감염돼 전신에 염증이 나타나는 증세)이 진행되면 치명적이라고 판단해 신속히 수술을 결정했다. 사고 열흘 만인 2월 27일 연우는 인공호흡기를 뗐다.

 지금 연우는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있다. 울산대병원에서 8차 수술까지 마치고 3월 이 병원으로 옮겼다. 좀 더 전문적인 재건성형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23번 수술을 받았다. 부러진 뼈가 붙고, 새 살이 돋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직 알 수 없다.

 지난 12일 병원에서 연우를 만났다. 아직은 하반신을 쓰지 못해 병상에 누워서만 지낸다. 기자가 “잘 참고 있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연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경 교수 얘기를 꺼내자 미소가 번졌다. “병원에서 나가게 되면 울산에 꼭 갈 거예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하고 올라왔어요. 많이 뵙고 싶어요.” 어머니 이씨는 "연우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경 교수는 끝까지 연우를 놓치 않았다"고 말했다.

 경 교수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외상외과 전문의 2세대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살린 이국종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 현재 연우의 주치의인 홍석경 서울아산병원 외상외과 교수 등이 1세대다. 경 교수는 홍 교수에게서 외상외과 수련을 받았다. 대한외상학회에 따르면 국내 외상외과 전문의는 172명이다. 홍 교수는 “촌각을 다투는 응급상황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부분부터 우선순위로 치료를 시작하고 다양한 전문분야와의 협진을 통해 치료 계획을 세우는 게 외상외과의 전문영역”이라며 “환자가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의료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증외상은 의사도 병원도 꺼리는 분야다. 진료 수가가 낮은 데다 사생활을 거의 포기해야 하는 극한의 환경 탓이다. 2012년 기준 9만7720명 정도가 중증외상으로 병원을 찾고 이 중 1만~1만2000명이 사망한다. 이 중 35.2%는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해 숨졌다. 중증외상환자의 진료체계를 갖춘다면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망자의 비율이 미국(15%), 독일(20%)에 비해 높다. 그나마 국내에서도 대형 재난사고로 중증외상치료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면서 보건복지부가 2017년까지 권역외상센터를 17곳(현재 9곳)에 세우기로 했다. 대한외상학회 이종복 회장(국립중앙의료원 진료부원장)은 “아직 걸음마 수준일 뿐”이라며 “관련 이송시스템에 대한 재정비 등을 포함한 전면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 교수에게 왜 성형외과 같은 돈 되는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환자를 극적으로 살려내는 것, 이 이상의 매력은 없어요.”

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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