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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한 계단 떨어진 포스코 매서워진 신용평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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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이제 성역(聖域)은 없다.”

 한국기업평가(한기평)가 11일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에서 한 단계 내리자 채권시장에서 터져나온 탄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 신용등급(AAA)을 받던 기업이 강등된 건 1985년 국내 신용평가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한기평도 1994년 포스코에 처음 AAA를 준 이후 단 한 번도 등급을 바꾸지 않았다.

 AAA급은 국내 기업 중 현대자동차와 SK텔레콤, KT, 포스코 단 네 곳에만 허용된 ‘왕좌’였다. 삼성전자는 국내에서 채권을 발행하지 않아 국내 신용등급도 없다. HMC투자등권 황원화 채권담당 연구원은 “최고 등급이 갖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국내 신용평가 역사상 일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강등은 절차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통상 신용평가사들은 등급을 내리기 전 ‘등급 전망’을 먼저 바꾼다. ‘긍정적’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꿔 그 기업의 신용등급이 앞으로 1~2년 내 내려갈 수 있다는 사인을 미리 시장에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이런 절차 없이 바로 신용등급을 끌어내렸다. 한기평은 “철강 시황이 둔화하고 경쟁이 심화돼 포스코의 수익성이 낮아졌다”고 강등의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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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신용평가사(신평사)들의 행보가 요즘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그간 신평사들은 좋은 등급을 남발하는 ‘등급 인플레’, 위기가 가시화된 이후에나 등급을 내리는 ‘뒷북 조정’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굼뜨던 신평사들이 올 들어 상당히 과감해졌다. 한기평의 포스코 강등 이후 한국신용평가(한신평)와 나이스신용평가도 13일 포스코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포스코만이 아니다. 한신평과 한기평은 최근 KT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유선전화 부문의 매출이 계속 줄 전망인 데다 이동통신사들 간의 마케팅 경쟁도 갈수록 심화돼 수익성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신한금융투자 김상훈 연구원은 “신용평가사들이 눈치보기에서 벗어나 신용등급에 대한 판단을 독립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라면서 “채권시장판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평가했다.

 신용평가사들이 깐깐해지기 시작한 건 지난해 동양사태 이후다. 당시 동양 계열사의 신용등급은 법정관리 신청을 전후로 급격히 떨어졌고, 이런 ‘뒷북’에 동양 채권 투자자의 피해가 더 커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투자적격 등급(AAA~BBB) 채권의 부도율은 2011년 0.23%에서 2012년 0.41%, 지난해 0.5%로 올라갔다. 동양시멘트, STX팬오션 등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다. 여론이 악화되자 금감원은 세 곳의 신평사들을 대상으로 특별검사에 들어갔다. 동양그룹 계열사에 매긴 신용등급과 평가 절차가 적절했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검사는 마무리 단계며 다음 달 중 결과를 제재심의위원회에서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출 사기에 연루된 KT ENS가 올 3월 법정관리(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간 것도 평가의 ‘거품’이 걷히기 시작한 계기다. 그간 대기업의 계열사나 자회사들은 상대적으로 후한 신용등급을 받아왔다. 기업 사정이 좀 어려워지더라도 탄탄한 모기업이 지원해줄 것이란 암묵적인 전제에서였다. 하지만 KT가 계열사의 법정관리를 사실상 방관하면서 그 전제가 깨졌다. 신평사들은 잇따라 KT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하향 조정했다. 파장은 다른 대기업으로도 미치고 있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KT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의 계열사 지원 가능성이 현실적인지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장 시장에 큰 파장은 일고 있지 않다. 채권시장 반응은 주식시장만큼 즉각적이지 않다. 게다가 현재 AAA등급과 AA+의 회사채 금리 차이는 평균 0.03%포인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포스코발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위 그룹에 차례차례 영향을 주는 도미노식 후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당장 포스코가 새롭게 자리잡을 AA+등급부터 ‘거품’이 도드라질 수 있다. 국내 1위, 세계 4위의 철강업체인 포스코만큼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들이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량등급인 AA급에는 또 업황 부진으로 해외 신평사들이 최근 신용등급을 내린 에너지·유통 분야 기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우증권 강수연 연구원은 “앞으론 우량채권 내에서도 ‘옥석 가리기’가 벌어지며 채권 발행 금리가 차별화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특히 국내와 해외 신용등급의 격차가 커진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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