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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담기 전에 철학·이야기 먼저 담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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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호 09면

한식 갈라 디너의 시작인 식전차와 전식. 매화쑥 장미차와 더덕불고기·밀쌈·석이편·죽순가지채 등을 준비했다. 검정 버섯과 흰 버섯을 마치 모란꽃처럼 모양낸 ‘모란화’, 고기와 비슷한 식감이 느껴지는 가죽 나물 장아찌 등이 눈길을 끈다.

한 끼 식사가 50만원이라면, 그것이 한식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지갑을 열까. 이에 답할 만한 행사가 최근 열렸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이 개관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갈라 디너다. 호텔 측은 ‘100년을 열어 손님을 맞다’는 이름의 한식 정찬을 세 차례(6월 12, 13, 27일)에 걸쳐 마련했고, 회당 인원도 60명으로 제한했다.

한식세계화를 생각한다 <下> 조선호텔과 이종국 셰프의 ‘제안’

초고가인 데다 해외 유명 셰프를 내세우지 않은 갈라 디너. 하지만 흥행은 그야말로 빅 히트다. 예약 오픈 이틀 만에 매진을 기록, 결국 세 번째 디너는 인원을 넘기게 됐다.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앞다퉈 ‘민원’을 넣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이 무모해 보였던 밥상을 이끈 이는 요리 연구가 이종국(54사진)씨다. 그는 2005년부터 ‘음식 발전소’라는 한식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의 달 음식 총괄, 국토해양부 어딤채 예술감독, 서울 고메 VIP 만찬 등을 진행하며 다양한 한식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10일 만난 그는 “한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다”면서 “최고 식재와 최고의 메뉴라는 걸 감안하면 200만원도 아깝지 않은 식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굳이 화두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풀어내는 한식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식 세계화의 길로 이어졌다.

디너의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 실제 상을 축소해 놓은 식기에 정과병꽃이와 두텁떡을 올렸다. 매실원소병(경단을 단물에 띄워 먹는 음식)·색동마카롱·송기떡도 함께 곁들였다.

코스마다 이름 붙인 스토리텔링 메뉴
이미 디너 예약이 꽉 찼다는 소식에도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식이 너무 저평가돼 있었던 거죠. 아니 100년이나 된 우리나라 호텔이 갈라 디너를 하는데 한식을 안 하고 뭘 하나요. 우리 음식이 절대 우습지 않아요. 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잘 몰라 그러는 거지. 쇼적인 스케일만 키워주면 되는 건데, 참.”

‘쇼적인’ 부분이란 이런 것이었다. 바로 스토리텔링. 그는 이번 행사에서 전식부터 디저트까지 9개 코스를 준비했는데, 코스 하나하나에 이름을 달았다. 백(白)-백(百)-지(地)-풍(風)-화(火)-수(水)-몽(夢)-진지-정(情)이 그것이다. “가령 지(地)는 땅의 기운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죠. 뿌리 채소와 어린 야채를 이용한 우리식 샐러드죠. 백(白)은 뭘까요. 백지처럼 아무것도 없음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의 식전차죠.”

그는 한식을 먹거리가 아닌 철학으로, 이야기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험 한 토막을 들려줬다. “VIP 소규모 만찬을 준비한 적이 있어요. 행사를 갔는데 식전차로 쑥 차를 쓰겠다고 고집했죠. 호스트 입장에선 귀한 보이 차를 생각했는데 말이죠. 단, 제가 쑥 차를 손님들께 내놓으며 그랬어요. 200년 된 매화 밑에서 캔 쑥이라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그날 쑥 차가 동이 났어요.”

이번 갈라 디너에 쓰인 ‘100년의 밥상’이라는 컨셉트도 스토리텔링을 잇는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자신의 요리를 이렇게 표현해 왔다. 50년 숙성 간장, 5년 발효 전통 식초 등 그가 쓰는 소스의 숙성만으로도 1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밥상이라는 뜻이다. 그는 외국 사람들에게 이런 스토리와 함께 간장을 맛보게 하면 ‘빈티지 와인 같다’는 극찬까지 듣는다며 흐뭇해했다.

제철 식재 발견은 셰프의 의무
그는 이번 디너를 준비하며 “새로운 한식의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그 핵심이 발효일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 숙성 소스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건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철에 맞춰 가장 영양소가 충실한 재료라면 한두 가지 소스만으로도 깊은 맛이 날 수 있다는 것. 한식이 맵고 짜게 알려진 건 이런 식재를 모르고 강한 맛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더했다.

“노르딕 퀴진이라고 채집 음식이 트렌드라는데, 그렇게 따지면 한식이 먼저예요. 우리 땅에서 그때그때 나는 식재료를 써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1000개도 넘을 겁니다. 건강하고 좋은 음식 먹자는 게 우리 음식이니까요. 이 땅에 숨어 있는 제철 음식들을 발견하는 일, 이게 셰프의 의무죠. 우리 체질에 맞는 나물이며 고기며 얼마나 많은데 안 먹어 봤으니 모르는 거예요.”

실제로 그의 입에서 나온 식재 이름 중에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맞춰 제철 음식들로 만들었다는 디너 메뉴판조차 해독이 불가능했다. 하나하나 그의 설명을 들었다. “상수리만두의 상수리란 봄철에 나는 도토리과 잎사귀를 말해요. 6월에 한창 나오는 도토리를 말려 고기 대신 만두소를 만들고 상수리를 이용해 만두를 쪄내면 기가 막히죠. 군소 조림? 군소도 몰라요? 전복하고 다시마만 잡아먹는 바다 달팽이라니까. 봄~여름 사이에 한창 잡히는데, 통영에서는 제사상에 올리는 진상품으로 통해요. 거 참, 너무 무식하네.”

타박을 듣고 볼멘소리를 해 봤다. 이런 식재료들이 너무 고급스러운 것 아니냐고. 한식 세계화를 한다면서 이런 식재들을 어떻게 해외에서 구하겠느냐고. 그는 요즘 한창 나는 초벌부추가 한 단에 800원, 크기가 작은 초란이 한 판에 2000원이라고 대꾸했다. “마트가 사람들을 다 바보로 만들어놨어요. 만날 똑같은 식재만 갖다 놓으니 뭐가 제철음식인지 알 턱이 있나.”

해외에서 구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더 키웠다. “푸아그라나 트뤼프가 우리 땅에서 나는 겁니까. 다 먹고 싶고 만들고 싶으면 현지에서 받아 쓰잖아요. 한식이 좋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져가게 만들어야죠.”

밥에 해당하는 진지. 가지좁쌀말이, 쌈밥 등 한 입에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보쌈김치는 한 그릇 자체가 한 포기가 되도록 놓고, 동치미 국수의 경우 화려한 장식 없이 무심한 멋을 고수했다.
땅의 기운을 얻기 위한 지(地)코스. 뿌리 채소와 어린 채소, 전복을 식재 삼아 숙성된 머위 효소와 간장으로만 맛을 냈다.

먹는 사람 배려하는 식문화 만들어야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가 아니라 ‘좋았다’는 평이 나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무리 입에 당기는 음식이라도 요리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식사하는 자리의 편안함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최고의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식이 얼마나 ‘배려’를 바탕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인지를 오랜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내로라하는 유럽 파인 다이닝에 뒤지지 않는 우아한 식문화가 가능하다는 말도 더하면서.

“벨기에 출신의 유명 푸드 칼럼니스트인 장 피에르 가브리엘이란 사람이 있어요. 온갖 별미는 다 먹어본 양반인데, 제가 만든 낙지 요리를 먹고 그러데요. 뭔가 예전에 먹던 것과 다르다고. 비법이 별 게 아니었어요. 머리랑 다리랑 살이 많은 쪽이 어딘가요. 당연히 머리니까 그쪽부터 끓는 물에 먼저 집어넣었죠.”

그는 김치 써는 방법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한 포기를 썰어 상에 내놓다 보면 손님은 일부분만 먹게 된다는 것. 조금씩 다양하게 맛보게 하려면 각기 다른 부분을 나눠 담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외국 사람들이 불판 놓고 고기 굽는 걸 싫어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뚝배기 안에 불에 달군 자갈을 놓고 그 위에 올려놓으면 먹는 내내 식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부엌에서 뭔가를 들고 나왔다. 솔잎을 묶어 만든 붓이었다. 외국인들이 젓가락질을 잘 못해서 전에 간장을 잔뜩 묻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찍어 바르라며 따로 만들었단다. 호기심 많은 이방인들에게는 먹는 음식에 재미를 더하는 덤이 됐다.

그는 ‘배려’를 자신의 음식 철학이라 강조하면서 한 상에 십수 가지 요리를 벌여놓는 한정식에 대한 반대론을 폈다. “음식을 양으로 따지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차렸으니 먹어라, 이런 문화는 이제 바뀌어야 해요. 음식이 넘쳐서 접시 위에 다른 접시를 겹치는 것만큼 보기 싫은 게 없지 않나요. 차가운 음식과 따뜻한 음식, 더 아름답게 운율을 맞춰 먹을 수 있잖아요.” 아파트에 동양화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시대가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목에선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한식 세계화의 길? 좋은 음식은 그냥 알아본다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늘 뒤따른다. 떡볶이·비빔밥처럼 대중화된 음식으로 알리자는 의견에 맞서 고급 메뉴로 승부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오는 식이다. 또 현지인의 입맛으로 조리법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선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게 거론된다.

인터뷰가 마무리 될 무렵,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일단 한식을 지나치게 서민 먹거리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너무 초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은 ‘한식의 중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제가 생각하는 한식은 막 화려한 정찬이 아니에요. 깨 뿌리고 알록달록하게 당근 썰고 파 썰고 그렇게 꾸미지 않은 요리죠. 비움의 미학이랄까, 무심의 미학이랄까. 그냥 육수 우려낸 물에 딱 무 두 조각 크게 썰어 넣는 식이죠.”

조리법에 대해서도 전통이냐 퓨전이냐의 찬반을 비켜갔다. “좋은 것들은 그냥 알아봐요. 유럽 최고 식당에 최고의 한식을 가져다 놔 보세요. 사람들이 그게 한식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죠. 그냥 좋은 음식인 거예요.”

이를 위해 그는 대안을 제시했다. 일단 셰프들 간의 제철 식재의 산지에 대한 정보 공유, 음식 레시피에 대한 공개였다.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한 기본 정보와 ‘며느리도 몰라’ 식으로 비법이 전수되지 못하는 한 한식의 표준화·계량화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식 세계화와 관련된 공무원들에게도 한마디 부탁을 전했다.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잖아요. 제대로 된 한식이 뭔지 일단 알아야 사업도 제대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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