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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불행을 가져와도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 의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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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호 28면

“어디부터가 고백이며 어디부터가 남들에 대한 고발일까?” 작가 스스로 그렇게 묻고 있는 카뮈의 『전락』(1956)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난해하면서 동시에 가장 독특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의 냉소적인 장광설로 일관하고 있는 형식만 그런 게 아니다. 클라망스가 죽치고 있는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도 카뮈의 여느 소설과는 배경이 다르다. 비가 많이 내리고 안개가 자주 끼는 도시는 이 ‘태양의 작가’에게 분명 이례적인 공간이다. 카뮈답지 않은 형식과 배경, 그리고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16> 도스토옙스키의『지하로부터의 수기』 vs 카뮈의『전락』

이런 특이성 때문에 이 작품에 영향을 준 원천에 대해 궁금해지는데, 바로 카뮈가 오랫동안 사숙한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작가들이 마흔세 살에 발표한 소설들이며, 무엇보다 ‘말 없는 상대방과 나누는 혼자만의 대화’라는 드문 형식이 두 작품 간의 영향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형식상의 공통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창작 배경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는 동시대 비평가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문학적 응전이었으며, 『전락』은 사르트르와의 논쟁에 대한 응답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배경이 철저히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두 작가의 목소리는 화자의 목소리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 배경이 된 논쟁은 문학적으로 승화돼 있으며 상징적·비유적 장치들을 통해서만 암시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는 ‘지하’라는 공간부터가 상징적이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지하 혹은 이면을 가리킨다. 자신이 병든 인간이자 심술궂은 인간이라는 걸 자인하면서 기나긴 고백을 시작하는 중년 화자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며 과학과 상식에 따라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에 조롱과 야유를 퍼붓는다. 인간은 개미가 아니며 ‘2×2=4’와 같은 수학적 정식으로 이해될 수도, 조종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면에 그가 옹호하는 것은 자신의 변덕스러운 욕망과 자의식이다. “의식은 예컨대 2×2보다 무한히 더 높은 것이다.”

이 ‘지하 인간’은 비록 의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줄지라도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설사 치통일지라도 ‘나’의 고통은 나의 존재를 입증해 주기에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생각의 소유자가 타인의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일례로 젊은 시절에 주인공은 당구장에서 한 장교가 지나가면서 길을 막고 있던 자신의 어깨를 거머쥐고 마치 물건처럼 옮겨놓는 일이 벌어지자 모욕감을 느낀다. 하지만 상대의 덩치가 너무 컸기에 실제로는 속으로만 성질을 부리다 꽁무니를 뺀다. 굴욕감에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결투를 단행한다. “물론 그가 힘이 더 셌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아프긴 했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목적을 달성했고 자긍심을 지켰으며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대중 앞에서 나 자신을 그와 대등한 지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전락』의 화자 클라망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남들과 대등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그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고자 한다. “나는 사실 높이 위치한 곳이 아니면 도무지 편치가 않았어요. 삶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내겐 높은 곳에 있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나는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택시보다는 마차가, 반지하층보다는 테라스가 더 좋았어요.”

클라망스는 그런 위치에서 마치 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우쭐대며 살아가던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앞에 있던 오토바이가 엔진이 꺼져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클라망스는 옆으로 지나가게 비켜달라고 말했지만 작달막한 오토바이 사내는 도리어 욕지거리를 했다. 화가 난 클라망스가 따귀나 한 대 올려붙이겠다는 심정으로 차에서 내린 순간, 몰려든 군중으로 경황이 없는 중에 오히려 귀싸대기만 호되게 얻어맞는다. 정신을 차리자 오토바이는 달아나버린 뒤였다. 카뮈 판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클라망스의 경험은 ‘지하 인간’보다 더 어이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클라망스는 상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근육도 쓸 만했지만 주먹다짐은커녕 예기치 못한 봉변만 당한 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반항(혁명)을 부정하는 『반항하는 인간』(1951)이 출간됐을 때 사르트르 진영에서는 신출내기 장송을 내세워 카뮈의 사상이 순진하다고 비판했다. 카뮈는 장송을 제쳐두고 곧장 사르트르에게 반론을 제기했고, 사르트르는 추가적인 반론을 봉쇄하면서 카뮈와의 오랜 우정을 버리고 사상적 결별을 선언한다. 사르트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카뮈지만 논쟁은 그에게 상처만 남긴다. 그 후 수년의 침묵 끝에 발표한 『전락』에서 사르트르와 자신의 모습을 모두 투사한 ‘재판관 겸 참회자’ 클라망스의 형상은 카뮈에게서 일종의 출구전략이었다. 1960년 교통사고로 카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르트르는 추도사에서 『전락』을 카뮈의 최고작으로 치켜세웠다. 이 작품의 속내가 사르트르에게는 제대로 전달됐던 것이 아닐까.



필자 이현우는 서울대 대학원(노문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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