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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2002’ 포기 못할 이유는 홍명보식 데이터 축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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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호 10면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이 2014 브라질 월드컵 개막 이틀째인 13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포스 두 이구아수 플라멩고 스타디움에서 훈련 중인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다. 대표팀은 이구아수 베이스캠프에서 현지 적응을 마친 뒤 오는 18일(한국시간) 쿠이아바 아레나 판타나우 스타디움에서 러시아와 첫 경기를 치른다. [뉴스1]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한국 축구는 네덜란드 출신의 명장 거스 히딩크(68) 감독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큰 경기를 치른 경험이 풍부하고 선수 선발과정에서 인맥에 휘둘리지 않는 지도자를 통해 대표팀의 국제 경쟁력을 끌어올리자는 의도였다. 히딩크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축구대표팀은 4강 신화를 이루며 기적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의 환희는 ‘히딩크 매직’이라는 표현으로 한국 축구 역사에 아로새겨졌다.

[2014 브라질 월드컵] 한국, 18일 러시아와 첫 경기

 12년 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는 홍명보(45) 감독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기적에 도전한다. 2002년 당시 그라운드에서 신화를 주도했던 홍 감독이 이번엔 사령탑에 앉아 팀을 이끈다. 홍 감독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데이터 축구’다. 과학적인 컨디션 조절 기법을 통해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는 복안이다.

히딩크는 본선 직전 ‘오대영’ 수모
한때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었다. 프랑스·체코 등 강호와의 평가전에서 잇따라 0-5으로 참패를 당한 뒤 싸늘해진 여론이 만들어낸 별명이었다. 따가운 주변 시선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은 자신만만했다. 본선 개막 50일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솔직히 말해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50%다. 하지만 하루에 1%씩 기량을 향상시켜 개막 때 100%로 만들겠다”고 자신했다.

 히딩크 감독은 투 트랙 전략으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우선 고강도 체력훈련을 꾸준히 실시해 선수들이 몸의 변화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했다. 본선 개막이 가까워질수록 90분을 편히 소화할 수 있게 된 선수들은 히딩크식 체력훈련을 감내했다. 몸이 완전히 만들어진 뒤에 비로소 전술훈련을 시작했다. 안정환(38) 중앙일보 해설위원은 “히딩크 감독은 체력훈련을 먼저 실시하다가 나중에 전술훈련을 병행했다. 전술적 완성도가 차츰 높아지면서 심리적·신체적으로 1%씩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선수단 전체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팀과의 평가전을 통해 세계 축구와의 심리적 간극을 좁히는 방법도 활용했다. 1998 월드컵 우승팀으로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던 프랑스와의 2001년 평가전(0-5 패)을 시작으로 체코(0-5 패)·스코틀랜드(4-1 승)·잉글랜드(1-1 무) 등 유럽의 강호들과 잇따라 평가전을 치렀다. 5골 차 대패를 안긴 프랑스를 월드컵 개막 한 달을 앞두고 다시 만난 히딩크호는 비록 패했지만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2-3으로 석패해 가능성을 보여줬다.

홍명보호, 컨디션 상승 주기가 문제
홍명보 감독은 최근 네티즌들로부터 ‘사대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10일 미국 마이애미 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나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0-4로 완패한 후유증이다. 대표팀은 1월 미국 전지훈련 중 치른 강호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도 0-4로 졌다. 2014년 한 해 동안 6차례의 평가전을 치러 2승(4패)에 그쳤다. 코스타리카(1-0 승)와 그리스(2-0 승)에 이겼지만 가나·멕시코·미국(0-2)·튀니지(0-1) 등에 잇따라 덜미를 잡혔다.

 히딩크호와의 가장 큰 차이는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주기가 늦다는 점이다. 히딩크 감독이 마지막으로 0-5로 패한 건 본선 개막을 9개월여 남긴 시점이었다. 홍명보호는 본선 첫 경기를 8일 남겨두고 치른 마지막 평가전에서도 0-4로 졌다. 홍 감독은 가나전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실점 장면에서 실수가 나왔지만 전술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평가전의 스코어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자신감의 배경에는 ‘데이터 축구’가 있다. 홍 감독은 이케다 세이고(54) 피지컬 코치를 중심으로 선수단의 몸 상태를 꾸준히 체크 중이다. 파주 대표팀트레이닝센터와 미국 마이애미를 거치는 소집훈련 기간 중 셔틀런 테스트(일정 간격의 거리를 서로 다른 속도로 반복해 달리도록 한 뒤 심장박동수를 체크하는 체력 검정 방법)를 꾸준히 실시해 선수들의 체력 변화 추이를 점검했다. 이뿐만 아니라 혈액 내 젖산의 수치를 측정해 선수들의 피로 회복 능력도 살폈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최적의 훈련 방법을 적용해 컨디션 향상을 돕기 위해서다. 홍 감독은 2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같은 방법으로 동메달을 따냈다.

대량 실점은 경각심·배포 키울 기회
홍명보 감독의 지도 철학에 대해 스승 히딩크 감독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한·일 월드컵 멤버들이 함께한 오찬에 참석한 히딩크 감독은 “홍 감독은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강팀을 상대로 한 도전을 계속해야 한다”면서 “세계 최강 브라질을 평가전 상대로 선택한 것 또한 옳은 선택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강해지기 위한 정도(right way to be strong)를 걷고 있다”고 격려했다.

 2001년 체코와의 평가전 당시 0-1 상황에서 백패스 실수로 실점을 허용해 대패의 빌미를 제공했던 김남일(37·전북)의 생각도 비슷하다. “체코전 당시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90분 동안 믿어줬다. 교체됐다면 내 축구 인생은 끝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반에 2~3골을 먹으면 정말 경기하기가 싫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 속에서 선수들 사이에 경각심과 배포가 생긴다. 큰 경기에 나가도 위축되지 않는다. 월드컵을 앞두고 대패했지만 분명 잃은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말했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을 이룬 허정무 축구협회 부회장 겸 브라질 월드컵 선수단장 또한 “어중간한 패배보다 큰 점수 차 패배가 훨씬 낫다. 오히려 확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본선에서는 결국 실수를 줄이는 게 핵심이다. 가나전 패배가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평가전은 이겨도 져도 얻을 것 있다”
홍 감독은 미국 마이애미 전지훈련 기간이던 지난 5일 취재진과의 간담회에서 “우리는 하얀색에서 출발해 한국 축구의 컬러인 빨강으로 가고 있다. 지금은 분홍색 정도다. 러시아와의 브라질 월드컵 H조 본선 첫 경기까지는 선명한 빨간색으로 바꾸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대표팀이 브라질 현지 캠프로 낙점한 포스 두 이구아수에 도착한 이후에는 “평가전에서는 이겨도 져도 얻을 것이 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지만 선수들이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바꿀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며 반전을 자신했다.

 대표팀은 가나전 완패의 악몽을 털고 러시아전(18일·쿠이아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홍 감독은 “가나전 패배의 분위기는 마이애미에 남겨두고 왔다”며 심기일전을 다짐했다. 공격 구심점 박주영(29·아스널) 또한 훈련장에서 ‘수다맨’으로 변신해 팀 분위기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 윤영길 한국체육대 교수는 “한국 축구의 팀 정신은 ‘개개인은 부족하지만 하나로 뭉치면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는 바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서 “선수들이 ‘살아도 죽어도 함께’라는 가치를 공유한다면 평가전 패배의 심리적 부담감을 털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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