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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옹녀 비틀었더니 배꼽 빠지는 ‘18금’ 창극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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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뮤지컬 보러 가자고 하면 열에 아홉은 따라나선다. 창극 보러 가자고 하면 열에 아홉은 바쁘다고 한다. 노래와 춤이 있는 같은 음악극인데, 왜 그럴까. 창극은 ‘왠지 올드할 것 같다’는 편견 또는 ‘다 아는 내용, 더 볼 것 없다’는 착각 때문일 거다. 사실 전 국민이 꿰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의 줄거리를 눈과 귀로 확인하는 정도라면 새로운 감동을 기대하기 힘든 건 맞다.

그런데 최근 들어 창극이 ‘핫’해졌다. 김성녀 예술감독이 국립창극단을 이끈 2012년부터다. 사설만 남고 소리가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을 복원하고 ‘젊은 창작 창극’을 개발해 저변을 확대한다는 확고한 노선 아래 끊임없이 신작을 쏟아내고 있다.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을 시작으로 ‘배비장전’ ‘서편제’ ‘메디아’ ‘내 이름은 오동구’ ‘숙영낭자전’ 등은 타장르 유명 연출가를 적극 기용해 새로운 무대메커니즘을 실험하며 국립극장 창립 이래 최초로 전석매진을 기록하는 등 화제를 이어왔다.

호불호도 갈렸다. ‘장화홍련’ ‘메디아’ 등 창작 창극은 충격적일 만큼 신선했지만 어딘지 ‘창극 아닌 것’ 같았고,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등 일곱 바탕 복원사업은 신작임에도 기시감이 있었다. 가지각색 작품들이 ‘내가 바로 새로운 창극’이라 나서는 통에 ‘진정한 창극의 형식이란 무얼까’를 찾는 목마름도 더해갔다.

11일 막이 오른 고선웅의 ‘변강쇠 점찍고 옹녀(이하 ‘옹녀’)’는 개그를 방불케 하는 화끈한 대중성에서 그 해답을 찾은 듯하다. 고선웅이 누군가. 속사포 같은 대사와 쉼 없이 뒹굴고 구르는 에너지로 독특한 무대 미학을 빚어내는 재기 넘치는 연출가다. 원작 비틀기의 고수이며, 시대착오적 신파코드로 비극적 상황을 저렴하게 포장해 유발하는 엇박자 웃음이 장기다. 그가 ‘변강쇠가’에 손을 댄다니 올 것이 온 거다. ‘변강쇠가’는 19세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바탕에 포함되어 있지만 외설이라 외면받아 소리가 소실됐고, 1990년 박동진 명창이 어렵게 가사를 수집해 완창했지만 이후에도 저평가돼 불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유의 리듬감과 웃음코드로 무대에서 유희와 오락의 극한을 추구하는 고선웅만의 스타일이 ‘저렴한’ 변강쇠를 만나 B급 정서 물씬 풍기는 우리만의 대중 음악극을 탄생시켰다.

무릇 변강쇠와 옹녀다. 내용은 몰라도 영화배우 이대근과 원미경으로 통하는 조선시대 정력남과 색녀의 대명사가 무대에 서니, 국립창극단 사상 최초의 ‘18금 창극’이 됐다. 하지만 영화처럼 끈적하고 습기찬 공기는 느낄 수 없다. 오히려 변강쇠와 옹녀의 명예회복 프로젝트다. 색골 색녀 음담패설을 요절복통 러브로맨스로 승화시킨 것. 제목처럼 ‘음탕한 변강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유머에 방점이 찍힌 인간미 넘치는 옹녀의 시대를 열었다. 고전에서 남주인공에 가려 존재감이 미미했던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할 만큼 흔한 패턴. 하지만 ‘옹녀’는 억지스러운 의미 부여를 넘어 철저히 재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완결성 있는 구조를 향해갔다.

사실 원전은 변강쇠가 장승동티살로 죽은 뒤 지리멸렬하는 후반부가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고선웅은 완전한 창작이라 할 만한 2막에서 지루해질 때쯤 화끈한 클라이맥스로 승부수를 던졌다. ‘출생의 비밀’ 코드로 외세 침략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여인의 애환을 배경에 깐 뒤,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옹녀의 단호한 의지로 불타는 에너지를 끝까지 몰고 갔다. 운명과의 전쟁을 선포한 옹녀가 “아이 참 외로워라~”고 노래하며 바바리맨 스트립으로 장승들을 불태워 복수하는 장면들은 고선웅만의 키치감성이 빛나는 대목이다.

창극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돋보였다. 주인공보다 옹녀모, 대방여장승, 호색할매 등 주변의 코믹연기가 개성을 발휘했다. 특히 의녀 등 각종 단역을 두루 소화한 신세대 소리꾼 정은혜의 세련된 연기는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지난해 ‘단테의 신곡’의 아름다운 소프라노 베아트리체 맞나 싶을 만큼 시침 뚝 뗀 절도 있는 코믹댄스로 마치 직업이 개그맨인 양 객석을 휘어잡았다.

‘옹녀’는 26일간 23회 공연이라는 도전을 이어간다. 통상 4~5일 안에 막을 내려온 창극으로서는 대단한 파격이다. 국립창극단 역사상 최장기공연이라는 이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고선웅 스타일의 대중창극이 웬만한 뮤지컬보다 신선하고 볼 만하다는 거다.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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