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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75세 시인과 39세 뮤지션, 꾹꾹 눌러쓴 '우정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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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문학동네, 332쪽, 1만4800원

편지는 일기만큼이나 내밀한 글이다. 상대와 나만이 나누고 아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글이기에 편지 봉투를 뜯는 순간 느껴지는 약간의 떨림은 피할 수 없다.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75)와 뮤지션 루시드폴(39·본명 조윤석)이 지난 4월까지 2년간 주고받은 편지 40통을 묶은 이 책은, 마치 오빠에게 온 연애편지를 살짝 뜯어 엿보는 듯한 설렘을 준다.

 이들의 편지를 엿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2009년 출간된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 먼저였다. 미국에 있던 마종기 시인과 스위스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던 루시드폴이 2년여 대서양을 가로질러 나눈 54통의 편지는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2007년 8월, 편지 한 통이 바다를 건너 시인에게 닿을 때까지 그들의 사이는 멀었다. 나이도 하는 일도 너무나 달랐기에 ‘사이’를 논할 수 없었고, 거리를 따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서로 친밀하게 느끼게 했고, 시와 음악·예술 등을 넘나드는 대화는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첫 번째 서간집이 조심스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서간집에서는 조금은 편안하고 익숙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배어나온다. 문학과 음악뿐만 아니라 국가와 가족, 자연과 여행 등 일상과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들의 대화는 웅숭깊다.

 책장을 넘기며 새삼 깨닫는 것은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의 목소리다. 차분하면서도 단정하고,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글은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 같다.

그렇기에 이들의 대화는 겉돌지 않는다. 예술가의 고독에 대해 시인이 ‘기타줄이 떨어져 있어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써서 보내자 ‘적당한 거리가 주는 외로움에는 긴장감이 있어서 오히려 더 관계를 가깝게 해줄지도 모르겠다’거나 ‘모든 생물에게는 적당한 영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답장이 이어지는 것만 봐도 두 사람은 참 잘 맞는 대화 상대다.

 내 이야기를 담아 보낼 수 있는 수신인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들의 편지가 읽는 이에게 위안이 되는 이유다. 책에 실린 시인의 마지막 편지 속 한 구절이 그래서 더 와닿는다.

 ‘누구에게라도 언제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 옳고 그른 것에도 늘 엄격해야겠지만, 그래서 강직한 사람도 되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착하고 힘없는 것에 더 마음을 주고 그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시간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거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편지라는 것이 그렇게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니.

하현옥 기자

2007년 8월, 그들의 첫 편지

편지를 매개로 한 시인 마종기와 뮤지션 루시드폴의 긴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7. 8. 24 마종기 선생님께

 … 선생님의 시들은 낯선 도시에서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절망하던 고단한 하루의 샘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시와 산문을 모조리 다 찾아 읽고, 늘 되새김질하는 저와는 달리 선생님은 아마도 저를 모르시겠지요. … 설레는 마음으로 첫 편지를 띄웁니다. 선생님의 글을 감히 기다리겠습니다.

◆2007. 8. 30 윤석군에게

 … 조군의 첫 메일을 보니 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마음 풍경이 새삼 황량하게 그려져 있네요. 그래요. 환경이야 달랐지만 나의 처지 역시 비슷했지요. … 10여 년 전, 이런 시를 써서 발표한 적이 있지요.

 ‘그랬었다. 내가 처음 외국에 도착했던/ 삼십 년 전 밤에도 비가 왔었다/ 사정없는 외국의 폭우가 무서워/ 젊은 서글픔들이 오금도 펴보지 못하고/ 어두운 진창 속에 던져 버려졌었다’(‘첫날밤’ 중)

 … 이렇게나마 알게 되어 기쁩니다. 나는 일간 남미 여행을 갑니다. … 다녀와서 그곳 이야기를 들려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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