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각 변방 스웨덴 청정 자연의 맛으로 음식 신흥강국 변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8호 09면

스웨덴 중부 쇠름란드 지역의 버섯 채취. 가을의 숲엔 버섯이 천지로 널려 있다. 스웨덴은 모든 이에게 ‘접근권’을 인정해 버섯 채취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음식과 관광의 자연스러운 결합이다. ⓒ Jonas Overödder, 스웨덴 관광청

지난해 미국의 레스토랑 가이드북 ‘자갓’은 ‘지금 당장 가 봐야 할 전 세계 레스토랑 10곳’ 중 둘째·셋째로 스웨덴 레스토랑을 선정했다. 스톡홀롬의 ‘엑스테드(Ekstedt)’와 중서부 옘틀란드 지방에 있는 ‘파비켄 마가시네트(Fäviken Magasinet)’다. 도시에서 전기를 쓰지 않고 요리하는 ‘엑스테드’는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장작을 태워 고기를 익힌다. 야생의 레스토랑 ‘파비켄 마가시네트’에선 셰프가 낚시로 요릿감을 낚고 야채를 익힐 땐 가을 낙엽을 함께 태운다. ‘자갓’은 이들이 “기본으로 돌아가서” “스칸디나비아의 개성”을 선보인다고 소개했다. 두 레스토랑에 대한 이 간단한 설명은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웨덴 요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식 세계화를 생각한다 <上> 트라이 스웨디시 전략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전통의 요리 강자가 즐비한 유럽에서 스웨덴은 일약 다크 호스로 떠올랐다. 불과 수년 만에 생긴 일이다. 지난달 초 스톡홀름에선 대대적인 미식 행사가 열렸다. 북유럽 최대의 식음료 박람회인 ‘가스트로 노드(Gastro nord)’와 최고의 요리대회인 ‘보큐즈 도르(Bocuse D’or) 유럽’을 망라한 ‘스톡홀름 가스트로노믹 위크’다. 미처 몰랐던 스웨덴의 요리의 맛과 음식 문화는 물론 단숨에 변방에서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비결은 무엇인지도 살폈다.

최고 권위의 요리대회 ‘보큐즈 도르(Bocuse D’or)’ 유럽 본선에서 우승한 스웨덴의 토미 뮐뤼매키(왼쪽 사진). 새끼돼지를 이용한 고기 요리(오른쪽 위)와 대구를 주재료로 이용한 그의 생선 요리. ⓒBocuse D’or 감자는 스웨덴의 주식이다. 대표적인 일상 음식인 미트볼에도 으깬 감자와 링온베리 잼이 곁들여진다. ⓒSusanne Walström, 스웨덴 관광청

솔직히 스웨덴의 대표 메뉴가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관광청 담당자는 “몇 년 전이었다면 스웨덴엔 노벨상·이케아·아바만 있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이라고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심지어 스웨덴을 대표하는 미슐랭 2스타 셰프, 마티아스 달그렌조차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스웨덴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요리에 관한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스웨덴이 다이닝 트렌드의 중심에 선 건 최근의 변화와 밀접하다. 주춤하는 분자요리의 자리를 북유럽 요리, ‘노르딕 퀴진’이 채우게 된 것이다. 신선한 채소와 해산물을 재료 삼아 복잡한 조리법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맛을 추구하는 것이 노르딕 퀴진이다. 스웨덴이야말로 이 특징에 가장 부합하는 노르딕 국가일 터다. 노르딕 퀴진에서 강조하는 식재료를 낳는 것은 결국 땅과 바다이니 말이다.

‘보큐즈 도르’ 유럽 본선 우승 ‘작품’인 토미 뮐뤼매키의 미트 트레이(위 사진). 스웨덴식 커피브레이크 ‘피카’에는 달콤한 것이 곁들여진다(아래 왼쪽). ‘피카’ 단골 메뉴인 녹색 프린세스 케이크와 시나몬롤. ⓒTina Stafrén

맛의 본질은 재료 … 산·숲·들·바다의 ‘테루아’ 전략
길고 어두운 겨울 탓에 혹독하기만 한 동토(凍土)일 것 같지만, 스웨덴은 다양한 기후·환경 조건을 가진 나라다.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이르는 넓은 땅(45만 295㎢)은 이 조건에 따라 9개의 농작물 재배 지역으로 나뉜다. 이를테면 남부 스코네는 최대의 곡창지대이고, 발트해의 고틀란드 섬은 일조 시간이 길고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해 과수 농업이 발전했다. 와인 생산도 가능하다. 넓은 고원이 펼쳐진 북부의 라플란드는 베리의 천국이다. 극지 주위에만 자생하는 클라우드베리를 비롯해 수십 종의 베리가 자란다. 종일 빛을 내리쬐는 여름의 긴 태양 덕분이다. 이곳은 순록이 뛰노는 야생의 벌판이기도 하다. 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넓은 바다는 청어·고등어·새우·굴·홍합 등 각종 해산물의 보고다.

여느 노르딕 국가보다 다채로운 식재료를 마련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진 셈이다. 강점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스웨덴은 프랑스의 와인 용어 ‘테루아(terroir)’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기후·토양 조건을 뜻하는 이 단어를 통해 스웨덴은 좋은 요리를 만드는 자연 조건을 가졌다는 걸 자연스레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다.

지난달 7~8일 북유럽 최대의 식음료 무역전시인 ‘가스트로 노드’가 열린 스톡홀름 국제전시장은 스웨덴 요리와 음식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소였다. 여기엔 단 이틀간 문을 여는 레스토랑이 만들어졌다. 크지 않은 규모인데도 레스토랑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 각각 간판을 달고 있었다. 숲의 테루아, 산의 테루아, 들판의 테루아, 바다의 테루아.

스웨덴의 흙과 바다에서 생산한 식재료로 스웨덴 고유의 맛을 선보이는 장이었다. ‘테루아 레스토랑’을 위해 노벨상 만찬을 준비했던 크리스티안 헬버그, ‘엑스테드’의 니클라스 엑스테드 등 스타 셰프가 직접 나섰다.

‘숲의 테루아’에서 멧돼지 고기를 주문했다. 고기를 갈아 만든 소시지의 일종인 살시치아(salsiccia)는 우리네 순대와 닮은꼴이다. 순대보다 오동통하게 꽉 채워 넣은 고기가 퍽퍽할 법도 한데, 겉은 쫄깃하고 속은 촉촉한 것이 부드러우면서도 씹히는 맛이 있었다. 여기에 채소를 다져 만든 일종의 양념인 렐리시와 야생 아스파라거스가 얹혀졌다. 우리가 숲에서 고사리를 뜯어 오듯 유럽에선 야생 아스파라거스를 한 움큼씩 꺾어 와 요리해 먹는단다. 자연스레 수렵과 채집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노르딕 퀴진’을 오감으로 맛보는 듯한 느낌이다.

‘바다의 테루아’에선 스웨덴에서 피할 수 없다는 음식 ‘스카겐’을 냈다. 소스에 버무린 새우를 노릇하게 구운 빵 위에 얹어 먹는 오픈 샌드위치다. 어떤 빵이든 상관없지만 이날 테이블엔 호밀빵이 올랐다. 통호밀을 뜨거운 물에 불리고 쪼갠 뒤 호밀가루와 섞어 술에 발효시켜 구운 빵은 딱딱하고 거칠다. 오래 씹어 삼켜야 하니 먹는 방식까지 건강식일 수밖에 없다.

스톡홀름 외스테르말름에 있는 재래시장 살루홀(saluhall). 1888년 문을 연 실내 재래시장에서는 각종 농축산물을 판매한다. 세계 7대 시장에 꼽혔고 제이미 올리버가 “가장 좋아하는 시장 중 한 곳”이라고 꼽기도 했다.

커피가 있는 스웨덴식 사교 ‘피카’도 세계화
‘테루아 레스토랑’ 옆엔 커피와 달콤한 시나몬롤을 주문할 수 있는 카운터가 자리 잡았다. 특별하지도 않고, 스웨덴만의 것도 아닌 이 조합이 등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문화 ‘피카(FIKA)’ 때문이다. “스웨덴에 오면 tack(태크: 감사합니다), Hej(헤이: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배우는 말이 피카”라고 할 만큼 스웨덴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문화다.

명사로도, 동사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를 굳이 영어로 옮기자면 ‘커피 브레이크’다. 시나몬롤이나 케이크처럼 단것을 곁들여 커피를 마시는 게 ‘피카하는 것’이니 틀린 번역이 아니다. 하지만 먹는 행위보다 관계와 사교에 무게가 실린 ‘피카’의 함의를 담기엔 역부족이라 스웨덴 사람들은 커피 브레이크라 옮기기를 주저한다.

‘피카’는 친구·가족·동료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고, 아침·점심·저녁 시간을 가리지도 않는다. 직장에서도 최소 하루 2~3번은 피카를 한다. 오전 10시, 오후 3시로 정해진 시간도 있다. 하던 일을 던져놓고 20~30분씩 이야기를 나누는 게 과연 생산적일까 싶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화하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경제학자의 말을 ‘근거’라 내세우며 피카를 한다.

그 효과인지 피카는 스웨덴 밖에서도 개성 있는 커피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뉴욕의 5번가와 브루클린, 런던의 코벤트가든처럼 가장 트렌디한 장소에 스웨덴 국기를 나부끼는 카페가 생겨났다. 서울에도 ‘피카’라는 카페가 서너 곳 생겨났다. ‘세계화’를 빌미로 커피 브레이크라 번역해서 알렸다면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까.

해외 홍보 대신 관광 프로그램 적극 활용
이날 스톡홀롬 국제전시장의 메인홀에선 육류·치즈·과일·가공식품·식기·조리도구·서비스까지 요리에 관련된 1·2·3차 산업이 모인 박람회가 한창이었다. 또 다른 홀에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요리대회 ‘보큐즈 도르’의 유럽 본선이 진행됐다. 셰프와 미식가를 포함한 업계 관계자가 모두 모인 가스트로노미의 현장은 스웨덴 정부가 오래 준비한 야심 찬 행사였다.

2008년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 새로운 요리의 국가’를 어젠다로 설정했다. ‘트라이 스웨디시(Try Swedish)’라는 슬로건도 정했다. 정부 주도로 스웨덴 요리를 알리는 프로젝트는 우리의 ‘한식 세계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성과를 못 냈다고 비판받는 한국과 달리 스웨덴은 자체적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상반된 결과의 이유를 ‘가스트로노믹 위크’ 행사를 주관하고, ‘트라이 스웨디시’ 홍보를 총괄하는 스웨덴 관광청의 안네-마리 홉스타디우스의 설명에서 구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해외 광고? 레스토랑 오픈?

홉스타디우스는 “우리는 ‘트라이 스웨디시’의 광고는 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요리의 국가를 세우는 것인 만큼 홍보에 쓴 예산은 크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신 자연과 먹거리를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스트로 노드’ ‘보큐즈 도르 유럽’ 같은 국제적인 푸드 이벤트를 열었다. 사람들을 스웨덴으로 불러 모으고 외부의 시선도 스웨덴으로 이끄는 전략이었다.

특히 요리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보큐즈 도르’의 유럽 본선 개최는 가장 공들인 이벤트라고 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대회에 사용하는 주요 재료를 개최국에서 조달하도록 하면서 스웨덴이 누린 효과는 배가됐다. “유럽의 재능 있는 셰프들이 스웨덴에 모였다. 이들이 스웨덴의 신선한 식재료로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상 효과적인 게 있을까?”

마침 홈그라운드에서 스웨덴이 우승을 하고 노르딕 국가인 덴마크·노르웨이가 2·3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현장에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바이킹이 다시 정복에 나섰다”는 말이 나왔다. ‘노르딕 퀴진’의 초강세가 다시 증명된 자리의 정중앙에 스웨덴이 선 것이다.

앞서 옮겼던 미슐랭 2스타 셰프 마티아스 달그렌의 말, “스웨덴은 요리에 관한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뒤엔 남은 내용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스웨덴을 요리와 미식의 종착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많은 경험을 통해 스웨덴만의 퀴진으로 발전해 왔고 국제적인 관심도 얻었다. 이제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