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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며느리 내가 정한다” … 생명의 은인 딸 데려온 장쭤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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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호 29면

장쉐량(오른쪽 셋째)은 중국 주재 외교관 부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부인 위펑즈(오른쪽 첫째)는 장쉐량이 서양 여인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오른쪽 둘째는 장쉐량의 외국인 고문 도널드 윌리엄 헨리(Donald William Henry). 1931년 2월. 베이징 고궁 건청문(乾淸門).

인간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거대한 산과 흡사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제각각이다. 20여년 전, 홍콩의 노부인에게서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 대한 혹평을 들은 적이 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77>

“쑹메이링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정치부인이었다. 남편 장제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기지를 발휘했다. 중국의 퍼스트레이디로는 손색이 없었지만, 장제스를 망쳐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빼어난 미모도 아니었다. 쑹메이링의 얼굴은 변덕이 심했다.”

태평양전쟁 시절 중국군구 사령관 자격으로 인도를 방문해 간디를 예방한 장제스·쑹메이링 부부. 1942년 2월 15일, 뭄바이.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 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여자 칭찬하는 여자는 바보”라는 말을 믿어야 이해가 가는 내용이었다.

“남자들은 멍청하다. 음흉한 여자들의 별것도 아닌 행동에 깜빡 속아 넘어간다. 장쉐량도 쑹메이링에게 홀리는 바람에 신세를 망쳤다. 위펑즈(于鳳至·우봉지)라는 현명한 부인을 두고 쑹메이링에게 넋을 잃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장쉐량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며 여자는 쑹메이링 같아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위펑즈는 장쉐량의 부인이었다. 그것도 여러 부인 중 하나가 아닌, 조강지처였다. 나이는 장쉐량보다 3살 위, 쑹메이링과 동갑이었다. 동북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장쭤린의 큰며느리가 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얘기는 1908년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부대가 펑톈(奉天·지금의 선양) 인근, 신민부(新民府·지금의 신민시)에 머물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민부에는 일본군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본군들은 중국군인들과 조우하면 “평생 목욕 한 번 안 하는 더러운 것들, 돼지우리 냄새가 난다”며 모욕을 주기 일쑤였다.

설날, 술을 거나하게 마신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군이 쏜 총탄에 중국 사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보고를 받은 장쭤린은 범인을 넘겨 달라고 일본군 측에 요구했다. 성사될 리가 없었다. 장쭤린이 물러서지 않자 일본군과 교섭을 담당하던 펑톈 교섭서(奉天 交涉署)가 중재에 나섰다. 결과는 장쭤린을 실망시켰다. “일본군은 한 사람당 500량씩, 1000량을 보상해라.”

장쭤린은 열이 치솟았다. 부하 몇 명을 불렀다. 마러거바즈(媽了個巴子)라며 욕부터 나왔다. “당장 나가서 일본군 세 놈을 처치해라. 총알도 아깝다. 몽둥이로 패 죽여서 똥통에 집어 던져라. 여기 1500량이 있다. 일본놈들이 정해 놓은 세 사람 목숨 값이다.”

‘동3성 총독’은 장쭤린의 성격을 잘 알았다. 내버려 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청나라 조정에 상주했다. “지난 5년간, 장쭤린은 토비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최근 들어 랴오위안(遼源) 일대에 토비들이 창궐했다. 장쭤린이 아니면 진압할 사람이 없다. 상금 5000량과 용포를 내려주기를 청한다.” 서태후는 총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장쭤린은 부하들을 이끌고 랴오위안으로 갔다. 중심지 정자툰(鄭家屯)에 병력을 배치했다. 정자툰은 병력 수천 명이 주둔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지휘부를 물색하던 장쭤린은 지역 상인협회 회장 위원터우(于文斗·우문두)를 찾아갔다. 위원터우는 미곡상을 운영하던 지역 명망가였다. “쌀가게에 지휘부를 차리라”며 장쭤린을 후대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못하는 말이 없을 정도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쭤린에게 위원터우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다싱안링(大興安嶺)에서 토비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비로 구원병을 모집해 포위망을 풀어준 사람이 위원터우였다.

장쭤린은 한 번 입은 은혜는 몇 배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머리를 싸매도 갚을 방법이 없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루한 여름밤, 평소처럼 위원터우와 한담을 나누던 중, 어린 소녀가 거실로 들어왔다. 들고 온 책을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한 곳을 콕 찍으며 위원터우에게 물었다.

“아빠, 이게 무슨 말이야?”

지켜보던 장쭤린은 속으로 “드디어 보답할 방법을 찾았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녀가 나가자 위원터우에게 사돈을 맺자고 간청했다.

1911년, 장쭤린은 펑톈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했다. 아들 장쉐량이 열한 살이 되자 혼인 얘기를 꺼냈다. “정자툰에 네 신부 될 여자애가 있다.” 장쉐량은 시큰둥했다.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다. 넓디넓은 펑톈에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자툰은 무슨 놈에 정자툰이냐”며 투덜거렸다.

장쭤린은 단호했다. “나는 네 신부를 구한 게 아니라 내 며느릿감을 구했다. 데리고 살 여자는 네가 어디 가서 주워 오건 상관 않겠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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