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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반가운 비상식적인 상황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8호 30면

“엄마. 우리도 저런 아파트로 이사 가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심하게 자연친화적인 막내딸이 어느 날 TV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TV에서는 마침 아파트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푸른 하늘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거실로 끌어들인 넓은 창, 자동차 한 대 없는 너른 마당에 끝없이 펼쳐지는 녹지대 그리고 그 가운데 알프스의 기운을 머금은 듯 투명한 물빛을 드러낸 호수.

광고 속의 아파트는 바로 그런 곳에 세워져 있었다. 아이는 비록 아파트라도 그런 곳이라면 살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세계일 뿐, 현실 속의 아파트는 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20년이 넘는 세월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의 1층은 앞쪽으로는 거대한 축대, 뒤쪽으로는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에 가로막혀 있었다. 앞뒤가 막혀 있으니 바람도 잘 안 통하고, 햇볕도 잘 안 들어왔다. 바깥 날씨가 아무리 화창해도 아파트 안은 굴 속처럼 어두웠다. 그래서 대낮에도 늘 불을 켜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햇볕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천성적으로 자연친화적인 기질을 가진 막내딸은 “엄마, 나 양지바른 집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노래를 불렀다. 결국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단독주택은 가격도 비싸고 관리하기도 힘드니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중간 정도 되는 빌라로 이사 가기로 했다.

그 후 나는 새로 살 집을 보러 다녔다. 내가 원하는 집은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며, 조용하고, 천장이 높고,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집이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집을 보러 다니는 동안 내가 내세운 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집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넓은 평수에 럭셔리한 외관을 자랑하는 집들은 많았다. 고급 빌라로 분류되는 이런 집들은 대개 한국 사람은 발음하기 힘든 국적 불명의 요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거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넓었고, 바닥과 벽은 온통 대리석으로, 화장실은 값비싼 외국산 욕조와 세면기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싼 집 중에도 내가 생각하는 ‘살기 좋은 집’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집은 별로 없었다. 한 층이라도 더 짓기 위해서 그랬는지 천장이 지나치게 낮았고,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창밖으로는 초록의 나무 대신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시키는 국적 불명의 럭셔리 빌라가 턱 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집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열심히 발품을 판 덕에 다행히 원하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어 외관은 허름하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빨간 벽돌집이었다. 이 집에서는 해가 하루 종일 환하게 들어온다.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에 작은 새들이 앉아 지저귄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이 왔는지 잘 몰랐지만 이 집에서는 아침이 되면 즐거운 새소리와 환한 햇빛이 잠자리에 누워 있는 나를 깨운다. 그러면 나는 베란다로 나가 온몸으로 햇빛을 맞으며 새들의 노래소리를 듣는다. 이 집으로 이사한 후 매일 맛보는 행복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이 행복이 실감 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희한한 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 이보다 훨씬 주거환경이 나쁜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생활비가 싸게 든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다. 훨씬 싼 비용을 지불하고도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데, 왜 콘크리트 박스 안에 갇힌 아파트 생활을 고집하는 것일까.

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집을 주거가 아닌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보는 기준이 살기 좋은 집이 아니라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집,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는 집이 되었으니 이런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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