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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작은 연못' 저주 걸린 서울 보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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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논설위원

‘고승덕 25.6%, 문용린 16.4%, 이상면 9.0%, 조희연 6.6%.’

 지난달 21일 중앙일보·한국갤럽이 공동 조사한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선호도 결과다. 6·4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조희연 후보는 2위 문용린 후보와 제법 큰 격차로 당선됐다. 불과 보름 만에 꼴찌가 1등이 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선거 중반까지 부동의 1위는 고승덕 후보(보수 성향)였다. 고 후보의 딸이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이혼 후 친자녀 교육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글을 올리면서 판도는 급변한다.

 같은 보수 후보로, 부동의 2위였던 문 후보는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 문 후보 측은 고 후보를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 빗대며 자식을 저버리는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고 후보는 자신의 처가였던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일가와 문 후보 측의 야합 의혹을 제기했다. 스토리만 그대로 옮기면 막장 정치드라마다. 그러면서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때 조희연 후보는 보수 진영의 네거티브 진흙탕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고 후보를 맹폭하는 문 후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교육 정책보다 개인사가 사람들의 주목을 더 받는 건 당사자들은 물론 서울교육의 미래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고·문 후보가 이전투구하는 사이 조 후보는 ‘다른 물’에서 정책을 발표한다. 보름 만의 꼴찌 당선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보수 진영의 진흙탕 싸움은 양희은의 ‘작은 연못’을 떠올리게 한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정치판 ‘작은 연못’은 갇힌 사고 속에서 서로 물고 뜯는 공간이다. 그런 곳에 사는 정치인이 아무리 예뻐도 그렇게 보이겠는가. 이번 선거에서 적어도 서울의 보수들은 ‘작은 연못’에 머물렀다. 서울시교육감 선거와 마찬가지로 새누리당의 서울시장 경선 역시 그런 공간에서 진행됐다. 김황식 후보 진영은 정몽준 후보 아들의 “국민 미개” 발언과 재산 의혹을 들춰냈다. 정 후보 진영도 병역면제 의혹 등으로 되받아쳤다. 결국 최종 경선에서 정 후보가 승리했지만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쓴 영광이었다. 대법관·국무총리 출신의 ‘합리적 거물’ 김 후보는 패전 이상의 타격을 입었다.

 정 후보 측이 정식 선거전에서도 ‘작은 연못’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박원순 후보 부인의 출국설·성형설과 농약급식 의혹 등을 집요하게 제기했다. 정 후보는 대기업 오너이자 7선 국회의원이다.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스포츠계 거물이기도 하다. 정 후보는 이런 경력에 맞지 않게 네거티브 선거에 몰두했다. TV토론에 나온 그의 태도는 어색했다. 점잖은 토론이 어울리는 사람이 거친 비방 공세를 퍼부어야 했기 때문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행동했다. 반면 박 후보는 백팩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누볐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집단유세도 자제시켰다. 시민운동가 출신인 그의 이미지에 맞는 선거 방식을 택한 것이다.

 박원순 후보가 전통적인 보수 텃밭인 ‘강남 4구’ 득표수에서도 정몽준 후보를 누른 것은 단순한 야당 돌풍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그 분노는 여야, 보혁 중 어느 한쪽만 향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지금 정부의 잘못이 있지만 그 뿌리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쌓인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유병언·이준석·관피아로 대변되는 반칙·무책임·부패가 궁극적인 분노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보수의 네거티브 선거전은 매를 벌었다. ‘작은 연못’ 저주를 스스로 불렀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