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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 뒤편의 진정성 … 스타의 마음 ‘명중’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폴 매카트니 공연 모습을 독특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한 김명중 작가
데이비드-빅토리아 베컴 부부
내털리 포트먼
조니 뎁
스파이스 걸스와 함께 한 김명중 작가 가족

폴 매카트니(72)의 첫 내한 공연이 취소돼 낙심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가장 아쉬워한 사람은 MJ Kim이 아닐까. 한국 이름 김명중(42). 폴의 전담 사진작가다. 그의 공연과 행사를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한국 팬들의 그 유명한 ‘떼창’을 폴이 직접 느껴보게 하고 또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었을 터다. 그래도 그는 “폴은 반드시 한국에 올 것”이라며 긍정의 미소를 날린다.

그가 찍은 유명인은 폴 매카트니뿐만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 조니 뎁, 내털리 포트먼, 데이비드 & 빅토리아 베컴 부부, 스파이스 걸스, 크리스천 슬레이터, 매슈 매커너히, 스팅, 패리스 힐튼, 클라우디아 시퍼, 그리고 영국의 찰스 왕세자 부부까지 세계적인 스타들이 부지기수다. 그는 어떻게 이런 셀레브리티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폴의 공연 취소로 얼결에 한국에서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얻게 된 그를 중앙SUNDAY가 단독으로 만났다. 그는 드라마틱했던 자신의 삶을 들려주며 거의 말끝마다 이 말을 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죠.”

대일외고생 김명중의 청춘은 질풍노도였다. 부모님의 이혼이 가져다준 충격에 술과 담배를 달고 사는 불량 청소년. 결국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방송 관련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학을 준비했지만 꼭 뭘 해야겠다는 것도 없었다. 뉴욕으로 가려 했지만 유학원의 어이없는 실수로 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자 공항에서 학생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런던으로 방향을 돌렸다.

1995년 런던 칼리지 오브 프린트(LCP)에 들어가 막연히 ‘영화 감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영화를 공부하다가 사진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여럿이 하는 영화에 비해 사진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한국에서 사진책을 사다가 공부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다. 학업은커녕 먹고 살아야 했다. 견습 사진기자를 뽑는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법정에 카메라를 못 갖고 들어가니 밖에 있는 펍에 맡겨놓아라’는 지시도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어요. 부족한 게 많았죠. 영어 안 되지, 문화 다르지, 사진도 혼자 공부한 수준이지. 부족한 만큼 더 많이 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일찍 들어가고 늦게 나오는 나날이 반복됐죠.”

98년 어느 날 마침내 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가디언이었다. 80년대 영국의 유명 팝그룹 스팬다우발레(Spandauballet)가 해체 후 갈등으로 법정 앞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을 남다르게 잡아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거리에서 살았다. 법원 출입기자들이 주요 사건을 얘기해주면 피의자·고소인을 확인해 그들의 표정 있는 순간을 잡아내는 피 말리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1년 만에 데일리텔레그래프의 사진 프리랜서로 발탁됐다.

“고마웠던 것은 제게 가르쳐주는 것을 인색하게 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죠. 인종 차별도 없었고요. 자사 사진 기자를 보냈는데도 내 사진을 써 주었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영국의 연합뉴스 같은 회사인 PA(Press Association)에서 그를 불렀다. 당시 엔터테인먼트 산업 붐이 일었는데 현장에서 스트레이트 사진을 찍던 기자들은 그런 걸 싫어했다. PA는 엔터테인먼트 담당 사진부서를 신설하면서 그에게 풀타임오퍼를 했다. 비자 문제도 해결해주겠다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민국에서 거절한 것이다. “영국 포토그래퍼도 있는데 왜 이 사람을 써야 하느냐? 만약 영국에 없으면 EU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절박해진 그는 그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진기자와 편집장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다.

“그때 탄원서를 써준 사람이 50명이 넘었어요. AFP 여자 사진기자의 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홍콩에서 외국 기자로 지내보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겠다고. 한국 사람으로 어려운 경쟁 뚫었는데 거부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준 마음들이 정말 고마웠죠.”

2001년 PA 입사 후 팀원 없는 팀장이 됐다. 칸과 베니스 영화제, 오스카 시상식에도 PA 대표, 즉 영국 대표로 가게 됐다. 행사장에 가도 항상 가운데 자리였다. 인맥이 쌓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가 인물 사진을 좋아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 그 안에 있는 뭔가를 끄집어내는 일을 좋아하는구나 깨닫게 됐죠.”

2004년 사진 제공 업체 게티 이미지로 옮겼다. PA는 큰 회사였지만 어쨌든 영국 내 매체였고 게티는 글로벌 기업이었다. 로열 미디어 팀에 합류해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부부의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인도 첫 국빈방문을 2주간 취재하는 등 영역을 넓혀 나갔다.

2007년 프리랜서가 되어 ‘스파이스 걸스’의 재결성 월드 투어를 다녀온 그에게 친하게 지내던 PR 담당이 “폴 매카트니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두 번째 이혼 후 음악 투어를 재개한 시점이었다. 그 친구는 또 마이클 잭슨과도 연결해주었다. ‘This is It’ 콘서트를 앞둔 런던 기자회견 자리였다.

“이 바닥에서는 소수의 누군가가 연결 고리가 됩니다. 그 속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죠. 많은 단계를 거쳐 실력, 인간성, 신뢰도 등을 테스트받거든요. 일단 들어가면 편해집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제가 교만해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놀라움과 감사함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좀 잘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마이클이 죽고 나서 몇 개월간 일이 딱 끊겼어요. 그때 크게 반성했죠. ‘아,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잠시 까먹었구나’.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폴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더라고요. 월드 투어였어요. 2009년부터 남미, 북미, 유럽, 아시아를 다니기 시작했죠.”

“폴은 가족밖에 모르는 음악 천재”
-폴 매카트니와의 첫 만남은 언제였나.
“2008년 금실이 좋았던 부인 린다 매카트니(1941~98)의 책이 타센에서 출간된 시점이었다. 린다의 사진 전시회도 같이 열렸는데 폴이 린다 사진을 거는 모습 등을 찍는 일이 처음 한 일이었다.”

-비틀스 멤버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겠다.
“처음 리버풀 공연 가서 정신 없이 찍고 무대 뒤로 와서 카메라를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둥둥둥둥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실감했다.”

-지내보니 어떤가.
“폴은 악보를 읽고 쓸 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천재다. 게다가 항상 새로운 소리를 찾아다닌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원주민이 쓰는 북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하면 찾아가 들어보고 음악에 반영한다.”

-특별한 경험도 많았겠다.
“2011년 폴이 거슈인 어워드를 수상해 백악관 웨스트윙에서 오바마 대통령 가족과 국회의원 등 100~200여 명만 모인 가운데 작은 공연을 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과 영국 여왕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행사도 기억에 남는다.”

-인간적으로는 어떤가.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그는 ‘신적인 존재’다. 최고 권력자도 그를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따뜻하고 겸손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다. 명성과 재력과 겸손함을 동시에 갖춘 그를 정말 닮고 싶다.”

-린다와의 둘째 딸 스텔라 매카트니는 패션 디자이너로도 유명하지 않나.
“폴은 ‘요즘 젊은이들은 나를 스텔라 매카트니 아빠로 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사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
“그는 소박하지만 열정은 어마어마하다. 그와 사진 얘기를 하면 항상 긴장된다. 아트와 관련해 그는 정말 많이 알고 있다. 대중에게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 아닌가.

-일은 어떻게 하나.
“일정에 따라 일당으로 받는다. 보통 하루에 1000컷 정도 찍고 이 중 100컷을 골라 폴에게 40~50컷을 보여준다. 요즘엔 보정작업까지 하기 때문에 놀 시간이 없다(하하). 원래 보정팀이 따로 있었는데 뭔가 유니크한 느낌을 주고 싶어 직접 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가난한 그들의 미소에 삶이 바뀌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자. 힘든 젊은 날을 보냈다.
“삶의 방향이 없는 불량 청소년. 외환위기 때 너무 힘들었는데 고비가 지나가니 오히려 어머니·누님까지 우리 셋이 사이가 좋아졌다. 그 전에는 따로따로였는데.”

-어떻게 이겨냈나.
“런던 생활이 하도 힘들어 작은 교회에 나갔다. 2000년도 초반, 프리랜서 하면서 어려웠을 때였는데 목사님 도움으로 방글라데시 선교활동을 도우러 갈 수 있었다. 공항에 내리니 모든 사람이 거지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 웃고 있었다. 새벽 1시에 목적지인 나환자촌에 도착했는데 너무나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자리에 누웠는데, 그때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좋은 집에서 살며 좋은 차 타고 예쁜 여자 만나는 게 인생의 목표였다. 그런데 그걸 추구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허무했다. 돈 많고 힘 있는 집안의 친구만 사귀려 했던 내가 한심했다. ‘여태껏 헛된 걸 바라보면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몇 시간 동안 울었다. 그날 밤 이후 내 삶이 바뀌었다.”

-어떻게.
“당시 사귀었던 재미교포 여자친구가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LA로 돌아가 있었는데, 내가 ‘6년간 단기 선교를 떠나겠다’고 하자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결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001년 결혼하고 나니 비자도 해결되고 직장도 구했다. 그전까지는 우울한 삶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집에서 해주는데 나는 뭔가. 그런데 결혼하게 되면서 작은 것부터 감사하게 됐다. 결핍 자체가 축복은 아니지만 결핍이 주는 축복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 같다.”

-고졸 학력으로 영국 회사에 들어갔다.
“취업을 알아보는 동안 학력을 물어보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100% 내 포트폴리오만 봤다.”

-영어도 쉽지 않았을 텐데.
“영어도 서투른 제 3세계 출신의 마이너리티. 하지만 나는 그 점을 오히려 스트롱 포인트로 삼았다. 덕분에 나를 기억해 주었고 내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 주었다. 현장에서는 내가 디렉터니까.”

-폴과 일을 시작한 직후 대학원(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 입학해 석사(MA 패션포토그래퍼)를 받았다. 고졸인데 대학원을 어떻게 갔나.
“입학자격이 대학 졸업자 혹은 동등한 경험이 있는 자다. 98년부터 10년간 사진 찍어온 경력이 대학 졸업장을 대신했다. 나는 일하면서 계속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포토그래퍼란 무엇인가 등등. 그 전에는 어떤 렌즈를 쓸까, 카메라는 어떤 걸 쓰나 같은 기술적인 면을 주로 공부했는데 학교에 가서 배운 것은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가’였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단순히 학위나 스펙용이었다면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 다닌 1년 반 동안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다.”

-투어 다니면서 바쁘지 않았나.
“과제는 시간 맞춰 냈지만 수업 참석은 쉽지 않아 학교 측의 배려가 있었다. 대신 투어 이야기를 해주면 교수님도 학생들도 모두 좋아했다.”

“파트너를 무조건 기쁘게 해주려 했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부족한 게 많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잘해야 했다. 견습 기자, 홍보 담당자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다. 같이 커가면서 서로 많은 힘이 됐다.”

-어떻게 관계를 맺었나.
“많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내 클라이언트를 무조건 기쁘게 해주기 위해 작은 일 하나라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뭘 원하는지 충분히 알려고 했고 잘 안 됐을 경우 최대한 고쳐주려 했다. ‘공동작업’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손해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그것을 느꼈던 것 같다.”

-골치 아픈 파트너도 있었을 텐데.
“기억이 안 난다. 안 좋으면 다음엔 일을 안 한다는 주의다. 그런데 긍정적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 모이게 되는 것 같다. 좋은 사람끼리 당기는 자성이 점점 강해진다고 할까. 그건 자기가 선택하는 것 같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작가라 부르는 사람은 작품에 자기 삶이 녹아 있다. 자기 스타일이 확실한 작가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즐거운 미소를 짓고 떠나는 게 좋다. 나는 지금도 내 사진을 클라이언트가 좋아하지 않을까 봐 떨린다. 폴이 이런 말을 했다. ‘관중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부르면 되겠느냐’고. 그런 배려의 자세가 좋다.”

-인물 사진은 왜 좋아하게 됐나.
“원래 사람 만나고 얘기 듣는 걸 좋아한다. 촬영하는 순간은 서로 영혼이 벌거벗겨지고 독특한 시공간에서 정신적 공유를 나누게 된다. 서로 간 그 ‘호흡’이 딱 맞았을 때의 몽환적인 느낌이 좋다.”

-카메라도 많겠다.
“장난감 카메라부터 8X10, 심지어 100년 된 카메라까지 다양하게 활용한다. 나는 아날로그적인 것을 사랑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디지털은 실수가 없다. 실수하면 지우고 다시 찍으면 된다. 하지만 아날로그는 변수가 많다. 회복이 안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나는 그게 인간이라 생각한다.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기에 나다. 단점은 싹 빼고 포맷 하면 과연 좋을까. 난 인간이 아날로그적이라 좋다.”

-그래도 다들 디지털 카메라를 쓴다.
“LP 시절에는 판도, 바늘도 잘 닦아야 했다. 즉 노래 한번 들으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필름 시절에도 사진 하나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 노력 자체가 사진 찍는 과정이었다. 디지털 시대엔 손가락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노력이 없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특히 요즘 사진은 너무 소모적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통해 한 번 보고 버리는 게 돼버렸다. 1년 전부터는 콜로디엄 프로세스라고 하는 150년 전 초창기 기법으로 만들고 있다. 유리판이나 쇠 판에 화학용액을 부어 만드는 방식이다. 제작에 들이는 노력과 정성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세계적인 명사들과 작업하고 있다.
“최고의 스타들은 배려심이 넘친다. 조니 뎁은 내가 긴장하니까 ‘당신이 무슨 애기를 하든, 어떤 지시를 내리든 따르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러니까 저 위치에 있구나’ 싶었다. 지난번 그래미 어워즈에서 폴이 링고 스타를 만났을 때 그 옆에 있었다. 하필 그날은 존 레넌의 아들인 줄리언 레넌과 페이스북을 했고, 조지 해리슨 아들과는 술을 한잔 마셨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폴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비무장 지대 공연을 언급했다. ‘폴이 정말로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말고도 주변 사람들이 폴에게 한국 얘기를 많이 했다. ‘한국 관객들이 얼마나 뜨거운지 가봐야 안다.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그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된 게 누군가의 선물 같다. 가족을 위해 더 충실한 삶을 살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유엔의 한 국제기구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프로젝트를 2006년부터 추진해오고 있다. 내가 알게 된 세계적인 명사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데 문득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사진을 찍게 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MJ Kim 스튜디오 ⓒ MJ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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