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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 <13>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하나 … 『삼국지』도 한족의 굴절된 픽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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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지금은 창의적, 자기주도적 학습 방식을 권장하지만 선인들은 암송을 위주로 한 주입식 공부 방법을 선호했다. 박식과 엄청난 기억력 곧 박문강기(博聞强記)는 옛날의 모든 천재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능력이었다. 선비들은 일단 텍스트 암송에 전력을 다했다. 글을 잘 이해하고 지을 줄 알려면 먼저 글의 이치 곧 문리(文理)를 터득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경서 특히 『맹자』를 숙독했다. “『맹자』를 3000번 읽으면 문리가 툭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속설은 이래서 생겼다.

 중국문학의 명인들은 결국 암송 의 천재들이었다. 박물학적 지식이 작품의 태반을 차지하는 시 형식인 부(賦)의 대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비롯해 이후의 뛰어난 문학가·주석가들이 모두 그러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억에 의존해 수많은 언설을 인용하고 전거(典據)를 달았다. 당나라의 이선(李善)은 문학작품의 총집인 『문선(文選)』에 주를 달아 유명해졌는데 후에 이를 보충한 다섯 명의 학자 곧 오신(五臣)의 주석은 오류가 많아 소동파(蘇東坡)로부터 ‘황당한 시골 선비들(俚儒之荒陋者)’이라는 인신공격을 받았다. 청말 근대 초기에는 국학자 유사배(劉師培)가 박문강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13경 주소(注疏)를 모두 암송했다고 하니 정말 초인적인 기억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억은 언제까지나 견고할까. 기억은 때에 따라 굴절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허구화와 스토리텔링의 본능 때문이다. 프로이트(S Freud)는 사후성(事後性)이라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유년기에 입었던 정신적 외상이 후일 성장하면서 현재의 상황논리에 의해 합리화, 재해석되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 다. 소설과 같은 허구의 서사는 특히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억의 변형을 시도한다. 요(遼)·금(金)·서하(西夏) 등 강성한 오랑캐들의 핍박에 시달렸던 송나라의 유학자들, 엄혹한 몽고족 치하에 살았던 나관중(羅貫中) 등은 중원 한족으로서 심한 정통성 콤플렉스를 지녔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는 가장 취약했지만 한(漢)의 적통을 자임한 유비를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 결국 소설 『삼국지』를 통해 역사적 기억 속의 삼국시대는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굴절되었다.

 대중들만 그러한가. 청나라의 일류 문인 왕사정(王士禎)은 소설 속 허구의 지명인 낙봉파(落鳳坡)가 실재하는 줄 알고 시를 읊었다가 망신을 당했다.(※낙봉파는 유비의 모사 방통(龐統)이 전사한 곳. 지금의 낙봉파는 소설을 따라 생긴 지명이다.) 천학비재한 필자도 기억의 변형을 경험했다. 어릴 적 뒤뜰에 피어있던 살구꽃을 보면서 자랐는데 지난번 칼럼(5회)에서 짙붉다고 딴 소리를 한 것이다. 살구꽃은 매화처럼 순백한데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돌이켜보니 술집의 은유에 얽매여 기억이 굴절된 것이었다. 잠시라도 독자들을 오도한 것을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고려의 관청 일은 사흘을 못 간다(高麗公事三日)’ ‘냄비 근성’ 등은 과거든, 오늘이든 우리가 하는 일이 지속성이 없고 즉흥적임을 꼬집은 말들이다.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기억을 변형시킨다. 물론 이러한 심리적 작용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조가 어리석은 패장(敗將)은 아니며 살구꽃이 붉은 것도 아니다. 사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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