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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17화> 언젠가는 장례를 치러야 한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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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일기를 쓰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3년간 아버지의 암 투병을 바라보고, 또 가족으로서 함께하면서 느낀 편견과 현실과의 괴리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일반인들은 암환자에게 어떻게든 따스한 말을 하고 싶어한다. 병동에 있으면 "힘드시죠. 꼭 암을 이겨내세요" "얼마나 아프세요.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그동안 불효를 저질러 죄송해요" "치료 꼭 잘 받으세요" 같은 따스한 말이 쏟아진다. 물론 나를 비롯한 환자의 가족들은 "밥은 드셨어요? 뭐 드셨어요?" 같이 퉁명스러워보여도 암환자의 일상을 물어본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들어준다. 암환자에게 일상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 첫걸음이다.

바쁘게 일만 하느라 비자발적으로 불효자, 불효녀가 된 젊은이들을 위한 생생한 리포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병동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찌도 그리 효심이 깊느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과격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이다. 실제로는 토요일 점심 약속할 것을 병동에 가서 잠시 누워있다 오는 것이고, 아버지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사다드리는 정도다. 작은 행동이 암환자 부모에게 꽤 의미있는 추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얼마 남지 않았을 아버지와의 시간을 조금 더 재밌고 알차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불효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약 기운 때문에 눈이 침침하고, 만사가 귀찮아서 그 좋아하시던 신문도 읽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불효일기 연재 이후, 아버지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버지는 불효일기 매회를 읽어보면서 사실관계가 틀렸거나, 본인의 느낌이 온전히 표현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제언을 한다. "흉한 몰골을 뭐하러 찍느냐"는 이야기 대신 "이렇게 찍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불효일기를 함께 만들면서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하루 하루 남은 일상을 추억하고 또 즐거워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암 환자 중 가장 어려워보이는 환자만 있다는 종양내과 병동을 들락거리는 아버지는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가 참 중요하고, 오늘 할 일은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오늘 못할 것 같으면 나나 어머니께 반드시 해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장례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얼마 전부터 악화된 늑골암의 통증 탓일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두 장씩 가슴에 붙이고, 한 알만 먹어도 머리가 멍해지는 마약성 진통제를 몇 알씩 먹는 아버지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작심하고 장례 절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 본인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잘 이행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양대 관혼상제는 결혼과 장례이다. 하지만 장례는 결혼식에 비해 배 이상 까다롭다. 우선 상주 본인이 당황하게 된다. 나처럼 아버지가 오랜 기간 투병을 해서 심적으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했다 하더라도,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더할나위 없는 슬픔과 정신적 공황상태는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종교에 따라 장례절차가 다르고, 장소와 시간 등에 따라 장례 진행에 따라 고려해야 할 문제가 다르다.

아버지가 장례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것은 며칠 전이다. 당시에는 "나중에 이야기해요"라고 말했지만, 아버지와 헤어진 뒤 본가 인근에 있는 장례식장에 방문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장례를 하고 싶으니 알아보라고 말씀하신 곳이기도 하다. 집에서 4㎞ 정도 떨어져 있는 성당에도 찾아갔다. 이곳 장례식장에서는 돌아가신 고모님이 장례를 치렀다. 근처 대학병원 장례식장도 가봤다.

얼마 전에도 아버지는 또 장례식장 이야기를 하셨다. 말이 나온김에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수녀님 고모와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게 대뜸 문상객 편의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앉을 공간이 있어야지. 주차도 잘 되어야 한다. 먼 친척들까지 오면 50명은 장례식장을 지킬텐데 몽땅 밖에 세워둘 수는 없잖니. 문상객 편의를 챙겨봐라." 장례미사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평생 존경하던 이종사촌 형님 신부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려달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가 문상객들의 편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의외였다. 나는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가끔 생각하면 무섭다. 이 때문에 내가 죽게된다면 모든 것이 끝이고, 장례를 어떻게 치르는지, 누가 오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나 자신이 죽으면 안 되고, 죽기 싫다는 집착만 있었다.

아버지는 내친김에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이 죽을 경우 누구에게 연락을 할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아버지의 휴대전화에는 100여명의 지인들이 그룹별로 나눠져 있었다. 이 그룹은 아버지 친구들인데 한 명에게만 연락하면 될 것이고, 학원강사 후배들은 모두 문자를 보내주고, 어머니 지인들은 OOO여사에게만 전화하면 될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네 엄마는 이제 계좌이체 하는 법을 배웠다. 사회를 사는 방법을 거의 모른다. 그냥 나를 믿고 살림만 하다가, 내가 병들고 사업이 망해서 하루 종일 일만 한다. 내가 죽으면 네 엄마에게 사회의 기본 지식을 1년은 가르쳐 줘야 할 것이다."

담담하게 하나씩 메모하고, 또 암기했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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