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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근성 있는 철녀 루이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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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혜연 9단은 중국 루이 9단과 함께하며 배웠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사진 한국기원]

“몰라요, 정말 몰라요.” “에이~ 울보 아줌마가 오늘도 울고 있어요.” 2년 전만 해도 한국기원 4층에서 루이나이웨이(芮乃偉·51) 9단(이하 ‘루이’)과 후배 여자 기사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루이는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이끌어주었지요.” 조혜연(29) 9단의 어조엔 그리움마저 묻어났다. 1999년 한국에 정착했던 중국 여자 기사 루이는 한·미·일을 오가던 오랜 방랑생활을 마치고 2012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최근 상비군 여자대표로 선발된 조 9단을 19일 한국기원에서 만나 여자 바둑과 루이의 인연을 들어봤다. 중국 여자 바둑의 빠른 성장 배경엔 루이가 있다는 평가도 있어 그 또한 궁금했다. 조 9단은 현재 박지은(31) 9단과 함께 한국 여자 바둑의 맏언니다.

 -울보 아줌마가 뭐예요.

 “ 루이는 뭔가 물어보면 ‘몰라요’를 연발했어요. 어눌한 한국말로. 내숭을 떤 건 아니고 특유의 겸손이었죠. 루이가 ‘몰라요’ 하면 우린 그걸 ‘운다’고 표현했지요. 웃으면서 놀리는 겁니다. 예전에 조남철 선생은 유리하면 ‘졌네, 졌어’ 하셨는데, 그게 ‘우는’ 겁니다. ‘우는 소리 한다’는 말 있잖아요.”

 - 현재 한국 여자 기사들의 수준은.

 “10대 후배들을 중심으로 상향평준화됐어요. 일본엔 지지 않겠지만 중국엔 좀 그래요. 기량적인 측면보다 기세에서 약간 뒤처집니다.”

 -‘기세’가 뭔지.

 “중국은 루이가 든든한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위즈잉(於之塋·17) 5단이 뒤를 받치는 형국이에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루이를 뛰어넘는 카리스마를 갖지 못하면 한국은 최강이 될 수 없지요. 이끌고 밀어가는 힘이 부족한 게 기세가 부족한 거죠.”

루이나이웨이 9단

 -바둑에서 상징성이 그토록 중요한가.

 “1989년의 조훈현 9단을 보세요. 조 9단이 제1회 응씨배(應氏盃) 세계대회를 우승하고 나니까 일본에 대해 우리 모두의 자신감이 높아졌잖아요.”

 승부에는 기술은 물론 심리도 중요하다. 한 판에 250수를 넘어야 결판나는 바둑은 긴장감을 견뎌내야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다. 한두 판 패배했던 상대를 만나면 상대가 실력이 약해도 뭔가 꺼림칙하다. 어쩌다하는 작은 실수에도 “또 지는 거 아냐” 하고 자신감이 졸아든다. 이기기 힘들다.

 -조 9단도 2004년 여류명인전에서 루이를 2대0으로 누르고 우승해 세계 정상 수준임을 알렸잖아요.

 “이긴 적도 있지만 극복하지는 못했어요. 한두 번 이기는 것과 극복은 다릅니다.”

 -차이점이 뭐죠.

 “실력은 정신과 기술이 제대로 조화를 이뤄야 유지됩니다. 그 차이죠.”

 -조 9단이 루이가 되면 되잖아요.

 “루이는 바둑에 ‘경건’했어요. 전 그만 못합니다.”

 루이는 바둑 외엔 취미도 없었다. 오로지 바둑이었다. 후배들은 말하곤 한다. “기원 4층에 올라가면 언제나 루이가 있었다. 물어볼 수 있었다.”

 -겸손 아닌가요.

 “아니에요. 제가 볼 때 후배들 중에도 루이만한 기사는 없는 듯해요. 대국 때 루이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합일 자체였어요.”

 루이의 역할을 돌아보면 바둑 공동체의 실력이 느는 데는 리더가 중요한가 싶다. 바둑은 1인자의 수준을 공동체가 쫓아가는 세계다. 공부만 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격려와 정서적인 안정도 필요하다. 그 점을 신경 써야만 여자 바둑이 클 수 있다.

 -여자 기사들 전반에 대한 평가에도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던데.

 “솔직히 여자 기사들은 절박함이 남자 기사들보단 부족해요. 사회적인 이유도 있겠지요. 남자들은 세상 살면서 독자적인 삶을 꾸리는 문제를 더욱 절실히 느끼잖아요.”

 중국의 여자 기사들은 일찍부터 실력이 높았다. 녜웨이핑(<8076>衛平·62) 9단의 부인이었던 쿵샹밍(孔祥明·59) 8단은 70년대에 일본 남자 기사들도 이길 정도였다. 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중국이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여성의 사회 진출 과정에서 심리적이고도 사회적인 차별이 많이 사라졌다.

 -루이가 떠난 지 2년. 남긴 그림자가 크군요.

 “루이가 한국에 온 이후 우린 그를 뛰어넘고자 노력했지요. 극복해야 할 상대가 있으니까 노력하고 싶은 맘이 들더라고요. 아주 힘들었는데 성장통 이상이었어요.”

 조훈현 9단도 루이의 기여를 “(박지은이나 조혜연 등 여자 기사들이) 루이에게 맞으면서 컸다고 봐야지”라면서 높이 평가했었다. 루이의 실력은 강해서 조훈현도 국수전 도전기(2000)에서 질 정도였다(1대2). 다음 해엔 설욕해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루이가 중국에 있으면 다른가요.

 “눈앞의 현실감이 중요해요. 대상이 옆에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기 힘들거든요.”

 -대신해줄 만한 게 뭐 없을까요.

 “다행히 긍정적인 거로는 상비군에서 여자와 남자가 함께 공부한다는 겁니다. 여자들이 현재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는 기회죠. 허점을 그때그때 지적받는 건 정말로 귀하죠.”

 -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제가 뭘… 후배들은… 좀 더 성취 지향적일 필요가 있어요. 때로는 탐욕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성장을 갈구했으면 해요. 우리는 일본 바둑과 같은 전통적 예도(藝道)와 역사의 토대 위에 서 있지도 못하고, 중국처럼 집어삼킬 듯한 폭발력을 갖고 있지도 않아요. 기댈 것이 적은 만큼 내적인 강인함을 길러 아프도록 자신을 쳐가며 노력했으면 해요. 물론 이는 저 자신에게도….”

문용직 객원기자

◆조혜연=1985년 서울 출생. 97년 역대 세 번째 최연소(11세 11개월) 입단 후 2010년 9단에 올랐다. 결단력 있는 기풍으로 지금까지 타이틀전 우승 5회, 준우승 15회를 기록했다.

◆루이나이웨이=1963년 중국 상하이(上海) 출생. 1986~89년 중국 여자개인전 4회 연속 우승. 80년대 중반 이후 20년간 세계 여자 1인자를 지켰다. 별명은 ‘철녀(鐵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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