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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없는 고속철, 세계 처음으로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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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0일 경기도 의왕시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시험선로에서 차세대 고속철 ‘해무’가 무선으로 전력을 공급 받으며 움직이고 있다. 궤도 사이에 설치된 급전장치(검은색)가 고주파 전력을 자기장으로 변환하면 열차 밑에 달린 집전장치가 이를 다시 전력으로 바꿔주는 방식이다. [사진 한국철도기술연구원]

20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하 철도연) 시험선로. “열차 기동!” 무전 지령이 내려지자 차세대 KTX ‘해무(HEMU· Highspeed Electric Multiple Unit)’가 6량짜리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열차 지붕에 설치된 전력공급용 팬터그래프(pantograph)는 아래로 접혀 있었다. 선로 위 가선(架線)에서 전력을 전혀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열차는 아랑곳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150m의 선로 위를 시속 약 3~4㎞의 속도로 움직였다. 세계 최초로 무선 고속철 주행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철도연이 물리적 접촉 없이 대용량 전원을 열차에 공급하는 무선 전력전송 기술을 개발했다. 궤도 사이에 설치된 급전(給電)선로가 고주파 전력을 자기장으로 바꿔주면 열차 밑에 달린 집전(集電)모듈이 이를 받아 다시 열차가 달리는 데 필요한 고전압 전력으로 바꿔주는 방식이다.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선전기포트나 무선전동칫솔 충전 방식과 같은 원리다. 지난해 KAIST가 개발해 경북 구미에서 운행 중인 전기버스, 2010년 독일 기업 봄바르디어가 개발한 경전철 ‘프리모베’도 이런 기술을 채택했다.

 하지만 철도연이 개발한 기술은 지금까지 나온 무선 전력전송 방식 가운데 가장 대용량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KAIST 버스가 20㎑ 100㎾, ‘프리모베’가 20㎑ 200㎾ 전력을 전송하는 반면 철도연은 이보다 5배~10배 큰 60㎑ 1㎿(1000㎾) 전력을 보내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열차를 움직였다.

 ‘해무’는 최고 속도(시속 430㎞)로 달릴 때 약 9㎿의 전력을 사용한다. 이날 시연에선 4개의 집전모듈로 약 1㎿(개당 약 300㎾)의 전력을 차량에 공급했다. 박찬배 철도연 선임연구원은 “6량짜리 열차에 같은 모듈 30개를 달면 최고 속도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철도연은 “무전 전력전송 기술이 상용화되면 철도의 유지·보수 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현재 가선 방식과 달리 물리적 접촉이 없어 부품 마모가 없고, 고장이 나더라도 지상에서 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선 높이만큼 터널 단면적을 줄일 수 있어 건설비도 아낄 수 있다. 열차 높이를 현재보다 1.3m가량 키워 2층 객차나 화물열차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무선 고속철’ 상용화를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번 시연 때 급전선로와 열차 집전모듈 사이 간격은 3㎝였다. 고속주행 때의 흔들림을 고려하면 8㎝ 간격은 돼야 한다. 그러자면 장비 크기를 더 줄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전력효율은 더 높여야 한다. 무선급전 방식의 효율은 83%로 기존 방식(95%)에 못 미친다. 이를 최소 9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성도 문제다. ㎞당 25억원 수준인 제작비를 기존 방식과 같은 수준(㎞당 15억원)으로 낮춰야 상용화가 가능하다.

 김기환 철도연 원장은 “내년부터 경전철을 대상으로 상용화 연구를 시작할 예정이다. 4~5년 뒤 성과가 나오면 이를 바탕으로 고속철 무선화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의왕=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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