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물과 불의 연금술사만이 불러낼 수 있는 茶의 神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5호 14면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이 자신이 직접 제다한 녹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르고 있다. 박 소장은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의 차 계보를 5대째 잇고 있다. 조용철 기자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내어 도철(饕餮:흉포한 상상의 동물)처럼 되었소.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비결은 차 보시를 가장 중하게 치고, 명산의 진액은 상서로운 약초의 으뜸인 차만 한 게 없다고 들었소. 애타게 바라노니 아낌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다산(茶山) 정약용의 을축년(1805) 겨울 ‘걸명소(乞茗疏)’

[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한국문화 대탐사 <15> 전통 차(茶) 上

“나는 대사(大師)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가 않소.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가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차)빚을 한꺼번에 보내어 갚되 또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馬祖) 스님의 꾸지람과 덕산(德山) 스님의 몽둥이질을 받게 될 터이니, 수백천 겁이 지나도 피해 달아날 도리가 없을 거요.”-추사 김정희의 차 구걸 편지 ‘여초의(與草衣)’ 34

앞글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다산 정약용이 혜장 스님에게 애타게 차를 구걸하는 편지다. 사사로운 편지 글에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 형식을 취했다. 답답한 유배지에서 차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웃음 짓게 한다.

뒷글은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차를 구걸하는 편지다. 19세기 한국 최고의 인문교양인이 차 박사로 통하던 초의선사를 숫제 공갈 협박하고 있다. 물론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한 장난기의 발로다.

차가 뭐길래 당대의 거유들이 그토록 애걸복걸하며 생떼를 썼던 걸까. 곡우(穀雨)가 지나고 입하(立夏)를 며칠 앞둔 즈음, 취재팀은 남녘의 야생 차밭을 찾았다. 경남 하동 지리산 남쪽 기슭, 수정같이 맑은 화개천이 흐르는 화개면 운수리 일대는 호리병 속 별유천지다. 꽃피는 신선골 화개동천(花開洞天)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했던 시배지다. 화개천이 풀어져 섬진강과 맞닿는 데까지 좌우 산기슭에 500여 ㏊ 야생 차밭이 펼쳐진다. 비 갠 뒤라 야생 차밭이 더욱 푸르다.

“서로 인접한 칠불사와 쌍계사 일원은 경치도 빼어나지만 차에 얽힌 역사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우선 이곳 쌍계사 소유의 야생 차밭은 828년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 심었던 한국 차 시배지지요. 『삼국사기』(흥덕왕 3년條)에 나옵니다. 쌍계사에는 최치원 선생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습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인데 최치원 선생은 진감선사의 질박한 성품과 높은 정신세계를 차 마시는 습관으로 잘 드러냅니다. ‘중국차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땔나무로 돌솥에 불을 때서 달여 마셨다.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배를 채울 뿐이다’. 이 비문 내용으로 미뤄 보면 신라인들이 차를 가루로 만들어 마셨음을 알 수 있지요. 최치원 선생 또한 차를 즐겼던 걸로 보입니다.”

김동곤 쌍계제다 대표가 우리나라에서 차를 처음 심었다는 경남 하동 화개동천 시배지에서 차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김 대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한 차 명인이다.

김동곤 쌍계제다 대표는 향토사에 밝은 다인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차 명인이기도 한 그는 『왕의 차』를 비롯한 몇 권의 저서를 냈다. 취재팀을 쌍계사 경내로 이끈 김 명인은 진감선사비와 꽃담, 찻물로 써 온 음양수(陰陽水)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칠불사에서는 아자방(亞字房)과 초의선사의 차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곳 하동의 다인들은 이웃한 전남 구례 다인들과 차 시배지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하동에 시배지 기념비가 서자, 화엄사 장죽전이 진짜 시배지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차의 종자를 심은 곳이 지리산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양쪽 모두를 인정, 현재 두 곳에 시배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근대의 역사학자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 씨라고 전한다”고 썼다. 그 기록을 인정한다면 차 시배지가 또 달라지는 셈이다. 차를 통해 드높은 정신적 교감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다인들이 지역 간에 차 시배지 논란을 빚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 지리산 남녘 일대로 여기면 그만이다.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780년 당(唐)의 문인 육우(陸羽)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인 『다경(茶經)』을 집필한 이후 ‘차’라는 용어가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그전에는 차라는 글자가 없어 도(荼·씀바귀)로 불렸다는 것. 육우는 나 여(余) 자 부분의 한 획을 빼고 차(茶)로 명명했다. 茶를 파자(破字)하면 두 개의 열십(十)에 팔십팔(八十八)이 되니 합하면 108. 중국인들은 차를 즐기면 108세까지 장수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라는 글자를 환(丸)이나 고약처럼 인식하여 한 가지만 넣고 달이는 약물은 모두 차라고 말한다. 생강차·굴피차·모과차·상지차…. 이는 그릇된 것이다. 중국에는 이런 법이 없는 것 같다.”-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

보리차도 차라고 여기는 한국인의 대용차 개념을 다산은 분명히 바로잡고 있다. 차는 차나무(학명 Camellia sinensis)의 어린 순이나 잎으로 만든 마실거리다. 차나무는 동백나뭇과에 속하며 늘 푸른 활엽수다. 찻잎에 들어 있는 카테킨(Catechin·폴리페놀) 성분이 산소와 결합. 산화된 정도에 따라 녹차·백차·청차·황차·홍차·흑차로 나뉜다. 형태에 따라 흩어진 잎차와 뭉친 떡차로 나누기도 한다.

한국인은 고려 때까지도 차를 즐겼다. 하지만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차 문화는 쇠퇴하고 만다. 『다부(茶賦)』를 지은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처럼 차를 즐긴 선비가 있긴 했지만 주로 연행길에서 가져온 중국차를 얻어 마시는 정도였다.

취재팀은 야생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덖어 만드는 체험을 하기로 했다. 전남 순천 주암호를 끼고 모후산 동쪽 자락으로 향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이 깊어 대광천에 다다르자 내비게이션도 휴대전화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초의선사의 차 계보를 5대째 잇고 있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차밭은 심산유곡에 있다. 듬성듬성한 대나무 그늘 아래로 차나무들이 보인다. 차는 돌밭이나 대밭에서 난 것을 상품으로 치는데, 대밭차를 죽로차(竹露茶)라 한다. 해차를 채취하는 4월 말과 5월 초에 보름가량 머문다는 산막에서 원시의 밤을 보냈다. TV도 인터넷도 없는 절집 같은 산막이었다.

이른 새벽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신다. 뜰 앞 영산홍은 불이 붙었고 벽오동나무에는 연보랏빛 꽃이 피었다. 마을에서 올라온 아낙네들이 찻잎을 따러 산을 탄다. 동트기 전에 채취하는 게 좋다지만 야생 차밭에서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취재팀도 대숲으로 가서 손톱으로 여린 찻잎을 딴다. 새순이 올라와 그 옆으로 잎 하나가 펼쳐진 것을 일기일창(一旗一槍), 두 잎이면 일기이창이라고 한다. 그렇게 두 유형만을 골라 딴다. 곡우 전에 참새의 혀 같은 한 가닥 새순만을 따서 만든 차는 ‘세작(細雀)’이다. 부드러운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전통 우전차로 국제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명차다. 이처럼 세작이나 일, 이기를 선호하는 건 차 고유의 정기 때문이다. 쇤 잎은 떫고 써서 채취하지 않는다.

산에서 따온 찻잎은 줄기를 골라 잘라내고 무쇠 솥으로 덖는다. “쇠 비린내가 없는 무쇠 솥으로 섭씨 300~350도에서 잽싸게 덖어내죠. 불의 장악이 요체예요. 불 때는 화부(火夫)와 호흡을 맞춰 가며 솜씨 좋게 덖어내야 명차가 됩니다. 이 초벌 덖음에서 차의 품질이 결정돼요. 아저씨, 불이 세요!”

부뚜막에 올라앉아 차를 덖던 박동춘 소장이 불 조절을 주문하자 불 지피던 아저씨가 대나무 한 가닥을 재에 묻어 끈다. 박 소장은 30년 이력의 솜씨로 대나무 솔을 능숙하게 젓는다. 덖음은 ‘살청(殺靑)’이라고도 한다. 은은한 향기가 피어날 즈음 날렵하게 찻잎을 감쳐 담아낸다. 이때를 놓치면 불에 항복한 것이 되고 미리 담아내면 설익게 된다.

불에도 문무(文武)가 있다. 여린 불은 문화(文火), 드센 불은 무화(武火)다. 불 기운을 잘 다뤄야 명차가 나온다. 차를 덖는 박 소장은 당당한 여전사의 풍모다. 수제차(手製茶) 명인이야말로 연금술사다. 전다박사(煎茶博士)라고 칭송받던 초의선사도 매번 차를 덖을 때마다 불 기운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차 품평에 일가견이 있던 추사로부터 ‘불 조절을 잘하라’는 지적을 받곤 했다.

덖어낸 찻잎은 손으로 박박 비빈다. ‘유념(柔捻)’ 과정인데 차에 담긴 성분을 잘 추출하고자 세포벽을 뭉그러뜨리는 것이다. 대자리에 널어 창호지로 덮어 뒀다가 다른 가마솥에 재차 덖는다. 건조(乾燥) 과정으로 초벌 덖음 때보다 길게 진행되는데 이때 다향이 수시로 변하는 신비를 경험한다.

두 번째로 덖어낸 차는 뜨겁게 덥힌 구들방에서 말린다. 방 안은 난초 향기 못지않은 고혹적인 향기의 숲이 된다. 다인들을 매료시키는 해차가 그렇게 탄생한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해차를 우려내 마시며 담박소쇄(澹泊瀟灑), 그 맑음을 지향해 온 한국인의 혼을 생각한다. 내년 이맘때면 다시 이 산막에서 보름간의 정갈한 제다의식이 펼쳐질 터, 그것은 긴 기다림의 제의(祭儀)다.

일찍이 초의선사는 칠불암에 머물면서 차의 신에 대한 전기 『다신전(茶神傳)』을 편찬했다. 명나라 장원이 쓴 『다록(茶錄)』을 베낀 것이지만 특유의 향과 맛, 약성까지 지닌 차에 인격신의 지위를 부여한 초의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다.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체(體)다. 좋은 물이 아니고는 그 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제된 차가 아니면 그 체를 엿보지 못한다.”

초의는 이 다신과 만나는 과정과 절차를 다도(茶道)로 보았다. 다신은 불을 잘 다스려 갈무리해 둔 차 속에 깃들어 있고, 그 차를 뜨거운 물로 우려내면 비로소 나타난다. 차는 정신이고 물은 육체인 것. 건강한 육체와 정신의 조화는 어느 때나 미덕으로 통한다. 그래서 차를 만들고 우려낼 때 중정(中正)의 도를 말해 왔다.

한 잔의 차에는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정결한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인들은 지금, ‘커피공화국’에서 인스턴트 음료에 빠져 있다.



동행취재=한경환 기자,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