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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키우다 손주병 … 한 달만 쉬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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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국은 직장맘이 애 키우기 힘든 나라다. 갓난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쉽지 않고, 보내더라도 아침저녁 시간엔 구멍이 생긴다. 손 내밀 데는 부모밖에 없다. 환갑 안팎 나이에 손주를 보는 것은 중노동이다. 손목·허리에 탈이 생긴다. 개인시간도 없다. 자식은 이런 아픔을 알아주기나 할까. 5월은 가정의 달. 손주를 돌보는 부모의 건강악화 실태와 예방법을 알아본다.

“애야, 어디 가니. 이리 와.”

할머니와 손녀가 우산을 쓰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있다. 조부모가 손주를 직접 키우다 보면 손목·허리에 탈이 나기 쉽다. [중앙포토]▷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3일 오후 서울 휘경동의 한 아파트. 생후 16개월 된 손주와 할머니 이정인(63)씨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블록을 갖고 놀던 아이가 할머니의 휴대전화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씨는 지난해 둘째 딸(39)이 애를 낳으면서 충남 아산에서 서울로 왔다. 12.6㎏ 손주를 안을 때 손목과 허리에 무리가 간다. 애를 돌본 지 1년여 만에 탈이 났다. 이씨는 손목에 압박붕대를 하고 허리 보호대를 차고 지낸다. 석 달 전에는 척추관협착증 시술을 받았다. 이씨는 “애 키우고 다섯 식구 살림을 하려니 진짜 힘들다”며 “잠을 못 잘 정도로 팔과 어깨가 아파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조부모가 손주를 키우는 ‘황혼 육아’ 탓에 몸에 탈이 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소위 손주병(病)이다. 황혼 육아는 노화를 촉진한다. 흔히들 ‘손주 한 명 키우면 1~2년 늙는다’고 한다. 장안동 튼튼병원 조양호 원장은 “손목터널증후군, 허리 디스크, 관절염 등으로 병원을 찾는 60대 이상 여성 열 명 중 서너 명은 손주를 키우는 경우”라며 “처음에 가벼운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손주를 키우면서 빠르게 악화된다”고 말했다. 이홍수 대한임상노인의학회 이사장은 “손주를 키우며 마음이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노화가 빨리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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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복지부 보육실태조사(2012)에 따르면 직장맘의 절반(50.9%)이 부모에게 아이를 맡긴다. 무상보육을 한다지만 0~2세 아이는 어린이집에 맡기기가 내키지 않고, 저녁 늦게까지 제대로 봐주는 데를 찾기 힘들다. 회사 눈치 보느라 육아휴직 내기는 쉽지 않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영란 박사는 “자녀 부부의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손주를 안 봐 주기 힘들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조부모들은 손주가 크는 모습에 힘든 줄 모르지만 애가 크면서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 가장 탈이 많이 나는 데가 손목과 허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2년 손목터널증후군 환자의 79%가 여자이며 50~60대가 60%(7만6750명)를 차지한다. 척추관협착증과 무릎관절증 여성 환자 중 60대가 각각 30%를 차지한다. 이런 환자가 모두 손주병은 아니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남동구에서 세 살짜리 손주를 보는 박모(57·여)씨는 손목 통증을 참다가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손목 인대가 찢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박씨는 “가끔씩만 손주를 보면 더 예쁠 거 같은데…”라고 말한다.

 한국의 황혼 육아는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자녀의 애를 보다 보면 골병이 안 들 수 없다. 자녀 직장 스케줄이 우선이라 좀체 손주에게서 벗어나기 힘들다. 경기도 안산의 김모(62·여)씨는 얼마 전 어버이날에 사위가 건넨 돈봉투를 돌려줬다. 4, 6세 두 아이 양육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돈봉투를 거절하면서 김씨가 어렵게 사위에게 꺼낸 말. “한 달만 쉬고 싶네.” 김씨는 3년 전부터 손목터널증후군 치료를 받고 있고, 허리 디스크 수술도 받았다.

  애가 다치기라도 하면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의 유모(62·여)씨는 “놀이터에서 손주가 다른 아이한테 꼬집힌 적이 있는데, 딸이 ‘그런 것도 안 보고 뭐 했느냐’고 했다”며 “지나가는 말로 했지만 너무 서운해 일주일간 딸네 집에 안 갔다”고 말했다.

 개인 시간 내기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인천시 남동구의 박씨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게 유일한 내 시간”이라고 말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손주를 키우는 할머니들한테 우울증이 올 수 있다”며 “평소와 달리 짜증을 내고 반응이 느리거나 식욕이 떨어지는지 자식들이 잘 챙겨야 한다”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육아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신규철 제일정형외과병원장은 “아침에 스트레칭이나 맨손체조를 충분히 하고 아이를 업거나 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며 “안을 때는 팔을 최대한 몸쪽으로 붙이고 앉은 상태에서 안은 뒤 일어서는 게 좋다”고 말했다.

장주영·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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