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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김희애가 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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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도도한 기획실장 김희애 오직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김희애(혜원). 영혼없는 고급노비다. [사진 JTBC]

“나 잊어두 돼. 너는 어쩌다 나한테 와서, 할 일을 다 했어. 사랑해줬고, 다 뺏기게 해줬고. 내 의지로는 절대 못했을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냥 떠나두 돼.”(마지막회 재단 비리를 폭로하고 수감된 김희애가 유아인에게 하는 말).

 물론 유아인(선재)은 김희애(혜원)를 떠나지 않는다. 드라마는 후반부 교도소 운동장 옆 풀밭에 쪼그려 앉은 김희애를 한참 비춘다. 상류층의 단정함을 상징하던 포니테일 머리를 감방 동기들에게 뭉텅 잘린 그녀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13일 종영한 JTBC ‘밀회’(정성주 극본, 안판석 연출)는 지금껏 한국 TV멜로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역작이다. 20살 연상녀와 연하남의 파격 로맨스에, 클래식음악계 비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더해졌다. 안감독의 전작 ‘하얀 거탑’에서 선보인 탐욕스런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는 더 신랄해졌다. 불륜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통해 구원을 찾는 ‘아내의 자격’의 메시지는 한층 깊어졌다. 특히 마지막회의 임팩트가 컸다. 오직 성공을 쫓아 ‘고급 노비’로 살던 김희애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장면은, 무엇이 진정한 삶인가 되묻게도 했다. “단순히 해피 엔딩, 새드 엔딩을 넘어 미국 감독 더글라스 서크의 고전 멜로처럼 생각거리를 던지는 멋진 결말”(변재란 순천향대 교수)이란 평이다. 유아인도 종영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쩌면 선재는 천재보다 천사가 아닐까. 세상 모든 오혜원들을 구원하는…”이라고 썼다.

 제 2의 주인공 격인 클래식 음악이란 소재도 능수능란하게 다뤄졌다. 작가의 필력, 감독의 연출, 배우의 연기 3박자가 맞아떨어졌다. 김희애·유아인 등 주연 배우뿐 아니라 심혜진·장현성·박혁권 등 조연과 이름모를 단역들까지 앙상블 연기의 진수를 선보였다. 마지막회 시청률은 6.6%(닐슨코리아, 수도권 유료가구). 분당 최고 시청률은 8.8%였다.

유아인과 위험한 사랑, 그리고 갈등 20살 연하 천재 피아니스트 유아인(선재). 음악적 교감으로 시작한 둘의 관계는 ‘연애불능자’였던 김희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사진 JTBC]
모든 것 내려놓고 감옥으로 … 그리고 자유 재단 비리가 드러나자 금고지기 역할을 해오던 김희애(혜원)는 희생양이 되기를 강요받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폭로한다. [사진 JTBC]

 ◆김희애, 새로운 불륜녀=중년 여성의 로망 김희애는 ‘내 남자의 여자’(김수현 극본), ‘아내의 자격’에 이어 세 번째 불륜녀 연기를 선보였다. 극중 20살 연하남과의 로맨스는 최근 유행하는 연상녀·연하남 트렌드에서도 단연 최강이다. 보통 연상녀·연하남 로맨스라 해도 연애는 남자가 주도하는 반면, ‘밀회’에서는 여자가 관계를 리드하며 사회적 지위도 훨씬 높다(유아인은 원래 택배 기사였다). 사랑에 빠진다고 대책없는 순정녀가 되기 보다 김희애는 어린 연인과 사회적 지위 둘 다 지키려는 야심, 혀를 내두를 정도의 처세술을 보인다. 기존 한국 멜로에 나온 적 없는 강하고 현실적인 성인 여성이다.

 동화적 판타지는 넘쳐나지만 정작 섹스는 배제된 여느 드라마들과 달리 성적 수위가 높은 것도 ‘밀회’의 특징이다. 음악을 통한 성적 교감, 인물없이 대사와 소리만으로 처리된 ‘베드없는 베드신’ 등 고급스런 에로티시즘을 선보였다.

 ◆예술을 찍은 TV드라마=‘밀회’의 새로운 영상어법도 주목받았다. 탐욕의 세계에 걸맞는 어두운 화면, 김희애를 줄곧 뒤에서 바라보는 낯선 카메라 앵글, 5분 넘게 음악만 흐르는 롱테이크 등이다. 대중 드라마로는 불친절해보일 정도의, 예술영화급 영상실험이다. 음악과 영상의 결합 속에 미술적 성취도 돋보였다. 극의 흐름을 깨는 무리한 PPL(간접광고)을 최소화한 소품 사용, 공들인 세트(김희애와 유아인의 집) 등이다. 박혁권은 한 인터뷰에서 “선재 집이 진짜 세트 맞냐고 감독들에게 전화 많이 받았다. 영화에서도 그만한 세트 만들기 힘들다. 채워놓은 소품을 보면 대단하다”고 했다. 김희애 집 피아노실의 수제 스피커 쿠르베도 디자이너가 발품을 팔아 구해낸 것이다. 초반부에는 PPL이 거의 없어, 국내 드라마로는 드물게 아이폰이 등장했다.

양성희 기자

‘밀회’의 명장면?명대사

▶“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절절한 고백의 말을 해 준 것도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그저 정신없이 걸레질을 했을 뿐입니다. …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누구한테서도 그런 정성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걸, 심지어 나란 인간은 나 자신까지도 성공의 도구로만 여겼다는 걸. 저를 학대하고 불쌍하게 만든 건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와 절망을 줬겠죠” (법정에서 김희애가)
 
▶"론도 에이 단조. 이 곡을 치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 아, 이 곡은 치는 게 아니라 만지는 거래요. 음표가 전부 2770개 쯤이구요, 그 중에 겹화음이 500개 좀 더 되나? 나는 매일 당신을 그렇게 만져요. 언제나! 겁나 섹시한 당신” (수감 중인 김희애에게 유아인이)
 
▶“내 이래뵈두야 모택동 주석이 대문호 루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교 다녔고, 만 인민이 다 평등하다, 내가 내 주인이다, 그렇게 배웠소. 안 할 말로 내 맘에 들면 내 돈 주고라도 합니다. 사내가 돈 좀 있다고 해서 내 맘에 없는 아양 떨고 하는 거 그런 짓은 죽어도 못한다 말임다”(김용건이 껄떡댄 조선족 출신 식당 종업원이 김희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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