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고대사] 내물왕 이전 형성된 지방편제, 지금의 군·면·리로 발전

중앙선데이

입력 2014.05.1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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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28면

경주시 오야리의 지석묘. 한국의 초기 국가인 소국 형성 이전 촌장이 정치 지배자로 있던 촌락 사회(추장 사회)의 표지적 유적이 지석묘다. [사진 이종욱]
군(郡)·면(面)·이(里)는 현재 한국 지방 행정구역상의 단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편제의 기원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것도 제17대 내물왕(356~402) 이전 신라 때다.

<11> 신라·신라인의 또다른 유산

신라가 정복했던 경상북도 지방의 진한(辰韓) 소국(小國) 중 이서국은 청도군으로, 골벌국은 임천현을 거쳐 현재 영천시로, 압독국은 장산군을 거쳐 현재 경산시(경산군)로, 조문국은 문소군을 거쳐 현재는 의성군으로, 사벌국은 상주(尙州)를 거쳐 현재 상주시(상주군)로, 감문국은 개령군을 거쳐 현재의 김천시가 되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피정복 소국 지역의 촌들은 면(面)에 해당하는 행정촌으로 편제되었고, 행정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와 비슷한 자연촌으로 편제됐다. 현재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틀은 신라 초기, 내물왕 이전 국가 형성 과정에 그 기원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침묵을 강요받았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사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일본인의 주장에 따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은폐·왜곡시켜 왔다. 그와 달리 필자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해 왔다.

신라는 내물왕 이전에 몇 단계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 아래에 그 정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그러한 단계가 현재 한국사에 어떤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지 보겠다.

서라벌소국 이전 단계는 추장사회
『삼국유사』 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 전한 시절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1일 6부(六部, 당시는 6촌)의 조(祖)들이 각기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고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가 있다. 그때 6촌의 촌장(村長)들은 군주(君主)를 모셔 나라를 세우자는 의논을 했다. 이 기록에서 서라벌소국 형성 이전에 서라벌 지역에 6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라벌소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서라벌 지역에 등장했던 6촌이라는 정치체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을까? 필자는 이를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state) 이전 ‘추장사회(酋長社會, chiefdom)’에 해당한다고 보아 왔다(Conrad Phillip Kottak, 『Cultural Anthropology』, 2002).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촌의 촌장들이 조상으로 받들어졌고,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렸고, 후일 촌을 단위로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성(姓)을 준 사실 등으로 혁거세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현재 경주 지역에 있던 촌락사회(또는 촌장사회)는 인류학에서 말하는 추장사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서라벌 6촌, 촌락사회에 대해 다룬 바 있다(『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 서라벌 6촌의 각 촌은 동서와 남북이 각기 10㎞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는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기에 쾌적한 공간이라고 한다. 각 촌은 농경 등의 이유로 직경 2~3㎞ 정도 되는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촌락사회에서는 촌장이 하나의 촌 전체를, 마을의 장이 마을을 다스리는 2단계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석묘를 표지적 유적으로 하는 이러한 촌과 마을은 한반도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존재했다. 그중 촌들은 현재 면(面)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촌을 나눈 마을들은 현재 이(里)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추장사회)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신라 제17대 내물왕릉 추향대제. 지금도 내물왕 후손들이 왕릉 앞에서 때맞춰 제사를 지낸다.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을 모신 사당인 숭신전(崇信殿). 신라는 석씨 왕인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沙伐國)을 정복함으로써 진한 소국을 모두 정복했다. 기존 견해보다 100년 정도 앞섰던 것이다.
소국 면적 1000㎢  백성은 1만
서라벌소국은 서라벌 6촌을 통합해 형성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에는 기원전 69년에 6촌장들이 모여 “우리는 위로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해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立邦設都·나라와 도읍을 세우는 일)하지 않겠는가” 했다고 나온다. 그때 나정(蘿井) 근처에 나타난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는데, 6촌장들이 기원전 57년에 혁거세를 군주로 삼아 입방(立邦)과 설도(設都)를 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혁거세 집단이 서라벌소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입방이다. 서라벌소국의 군주가 되었던 혁거세 세력은 남산 서쪽 산록에 왕실의 보호시설로 금성(金城·『삼국유사』에는 나정 근처에 위치한 창림사(昌林寺)로 나옴)이라는 왕성과 그 안에 왕궁(후일 사량궁)을 축조했다. 이 같은 왕성의 축조는 설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서라벌소국은 대체로 1000㎢ 정도의 토지와 1만 명 정도의 백성으로 형성됐다. 6촌을 모체로 해 편성된 6부가 서라벌소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이때 촌락사회의 2단계 위에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3단계의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시간이 지나며 왕성 주변에 주택과 관청들이 들어섰다. 『삼국사기』 1에는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이 월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왕궁(후일 대궁)을 지어 왕들의 거처로 삼았다. 이로써 왕성을 둘러싼 도시로서 왕도(王都)가 확대되었다. 후일 왕도로 발전한 서라벌소국의 도읍은 6촌(후일 6부로 개편됨) 중 일부 촌에 걸쳐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도읍의 주인공인 왕과 그 일족들은 소국을 세울 때부터 6촌의 세력집단인 촌장(후일 부장) 세력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530년대까지 신라의 왕들이 6부 중 한 부의 부장이었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왕은 처음부터 6촌의 세력이 된 일이 없다. 마치 현재 대통령이 종로구청장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서라벌소국 형성 후 6촌장을 시조로 하는 육부성(六部姓)과 왕을 배출한 종성(宗姓)은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는 성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서라벌소국이 형성될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소국이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 소국의 구조는 서라벌소국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경주 조양동38호분에서 출토된 한경(漢鏡). 삼한소국의 왕들은 한경 등 중국제 물품을 가지고 위세를 과시했다.
진한 세력들 원거리 교역 시작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내군(內郡·중국 본토의 군)에서 온 고인(賈人·상인)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하며 원거리 교역을 했다고 나온다. 그 과정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이 크게 세 개의 교역권을 구성했다. 『후한서』나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후였다. 그 하나가 현재 경상북도 일대의 소국들로 형성된 진한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은 중국의 상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했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수출했다. 그 과정에 삼한 소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지고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 비록 신라의 경우보다 2세기 이상 늦기는 하지만 『삼국지』 ‘왜인’ 조에는 239년에 중국 측에서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에게 동경(銅鏡) 백매 등의 물품을 보내며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한 사실이 나온다. 이는 중국제 물품으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진한의 정치세력들은 스스로 낙랑군에 사람을 보내 원거리 교역을 했다. 이러한 원거리 교역체제를 위세품(威勢品) 교역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받아들인 중국제 위세품으로는 경주 조양동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등에서 출토한 것과 같은 동경·동탁·철제 무기·철제 농기구 등이 있다. 신라의 경우 위세품 교역은 소국 정복을 하기 시작한 1세기 중반 이후 점차 의미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른 현상이다. 신라는 그러한 위세품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성장한 변한의 북쪽 지역에 있던 소국들은 지리적인 이유로 서라벌소국을 원거리교역의 창구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으로 소국연맹의 각 소국에는 왕들이 있었다. 소국의 백성들은 각 소국 왕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진한연맹의 공동 시민권은 없었다. 그리고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서라벌소국도 연맹 내의 다른 소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단지 서라벌소국의 왕은 진한 연맹의 맹주로서 원거리 교역을 주관했고 외적 방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소국 간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진한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상북도로 그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서술도 바꿔야 할 때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진한 소국들이 서라벌소국에 정복됐다.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 24~57) 19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정벌해 멸했다고 나온다. 그후 신라는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을 정복할 때까지 진한의 모든 소국들을 정복했다.

『삼국사기』 2에는 제11대 조분왕(助賁王, 230~247) 7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내항해 제택(第宅)과 전장(田莊)을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을 단위로 군을 편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때 군으로 편제된 과거 소국의 영역에 성주(城主)를 칭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2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군을 통합해 다스리던 지방관으로는 185년에 지방관으로 처음 파견됐다고 하는 좌군주(左軍主)와 우군주(右軍主)를 들 수 있다.

이웃한 소국들을 정복하며 서라벌소국 영역은 신라의 서울인 왕경으로 바뀌었다. 그 안의 6촌은 6부로, 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로 편제됐다.

이제 우리는 빼앗긴 역사를 찾아야 한다. 8회에서 본 것과 같이 내물왕 이전 역사를 폐멸시킴으로써 제국 일본은 일선동조론과 창씨개명 정책을 펴며 한국인 폐멸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을 밝혔다. 그리고 9회에서는 광복 후 한국인 연구자들은 식민사학 청산을 외쳐왔으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일제가 만든 한국사 폐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다.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의 고리를 끊고, 한국인의 오리진과 한국 사회체제의 구조적 틀이 신라의 내물왕 이전 역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도 바꾸어야 한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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