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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포트] 대한민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를 가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서울 동숭동 대학로는 ‘연극1번지’로 자리매김했지만 치열해지는 경쟁 구도 속에서 창작극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연극 포스터 게시판이 있는 대학로의 한 골목.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서울 동숭동의 대학로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문구다. 하지만 정작 대학로의 연극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한 듯하다. 무대에는 창작극보다는 상업적인 작품이 대세를 이룬다. 극장들은 제살 깎아먹기 할인경쟁과 호객행위를 벌인다. 대한민국 연극계의 현주소다. 대학로 연극인들의 현실과 꿈을 취재했다.

4월 초의 어느 토요일 저녁, 대학로의 한 소극장. 공연이 끝나자 한 남자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무대로 걸어간다. 객석이 술렁이자 무대 위의 배우가 그를 소개한다. 직장인 남재진(31·가명) 씨다. 그가 오늘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게 될 것이라며 관객의 박수를 유도했다. 큰 박수 속에 여자친구 정유란(29·가명) 씨가 무대로 오른다. 남씨는 무릎을 꿇고 미리 준비한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말로 끝나는 편지를 모두 읽고 나서 남씨가 여자친구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건넸다. “좋겠다”, “결혼해요” 같은 장난 섞인 응원의 말들이 객석에서 튀어나온다. 다시 배우가 “여자친구는 남자친구 고백을 받아들이겠다면 두 손 위로 하트를 그려주시고요, ‘아니다, 이번 이벤트는 약하다, 다음에 다시 하면 생각해보겠다’ 싶으면 물구나무를 서주세요”라고 말하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정씨가 하트를 그려 보이면서 무대 위 프러포즈는 성공리에 끝났다.

연극이 끝난 뒤 무대 위의 깜짝 이벤트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도 상기된 듯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이 이벤트가 극장에서 준비한 ‘패키지 상품’이라는 걸 눈치채는 이는 드물다. 공연 기획사는 연극 관람권과 함께 두 사람에게 레스토랑 식사권, 프러포즈 동영상 촬영, 꽃다발과 선물을 준비해서 관객들에게 판매한다.

젊은 연인들이 관객층의 주류를 이루는 로맨틱 코미디를 중심으로 10여 개의 극장에서 이와 유사한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한다. 물론 돈을 받고 진행하는 것이지만 수익을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다. 연극기획사 관계자 김기현(37·가명) 씨는 “홍보효과를 위한 행사다. 많은 소극장이 이런 이벤트를 한다”고 말했다.

경쟁 심해져 ‘가짜 베스트셀러’도 등장

극장 간에 관객 모시기 경쟁이 가열되면서 생겨난 ‘아이디어’다. 대한민국의 연극 메카라는 대학로에는 모두 15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극장이 몰려 있다. 이 극장에서 매달 70여 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서울 시내 공연은 모두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다’고 말할 정도로 연극의 중심지는 서울 명동으로 통했다. 그러나 한 극장을 여러 극단이 돌아가면서 대관해서 썼기 때문에 여러 작품이 한꺼번에 경쟁을 하진 않았다.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고 세종문화회관이 새로 들어서고 나서는 광화문이 한때는 새로운 메카로 주목받았다.

1970~80년대에 신촌과 강남에도 소극장이 많이 들어섰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현재의 대학로를 중심으로 극단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옛 서울대 문리대 부지에 들어선 문예회관(현 아르코극장)을 중심으로 신촌 등 서울 각지에 산재해 있던 소극장이 하나 둘 몰려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 와서는 전용 소극장이 30여 개, 활동극단이 100여 개에 이르는 거대한 연극 타운을 형성했다.

2004년 동숭동 일대가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연극 덕분에 땅값이 올랐지만 연극인들에게 돌아온 혜택은 없었다. 오히려 문을 닫는 소극장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창작 뮤지컬과 어린이·청소년 연극의 산실로 꼽혔던 학전그린 소극장도 그중에 하나다. 학전그린 소극장은 새로운 건물주가 바뀌면서 건물 용도를 변경하는 바람에 지난해 3월 문을 닫아야 했다. 17년 동안 5천 회가 넘는 공연을 펼쳐왔고, 대표작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3232회나 공연한 유서 깊은 극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대관료 인상도 소극장들의 설 자리를 점점 비좁게 만든다. 10년 전 1일 30만 원선이었던 한 소극장의 대관료는 현재 70만 원대로 오른 상태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극단이나 기획사가 떠안아야 한다. 그렇다고 선뜻 대학로를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경쟁은 과열을 넘어 전쟁으로까지 치닫는다.

일부에서는 ‘가짜 베스트셀러 연극’까지 등장한다. 최윤우 서울소극장협회 정책실장은 “일부 기획사는 자기 작품 티켓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방법으로 예매전문사이트에서 연극 순위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리곤 예매를 취소해버린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예매순위가 올라가면 호객꾼들은 다시 이를 영업수단으로 활용한다. 연극 순위가 표시된 캡처 화면을 보여주며 “요즘 잘나가는 연극”이라고 홍보하는 식이다.


요즘 대세는 ‘섹시 로맨틱 코미디’

대학로의 호객 영업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극단별로 호객꾼을 고용해 표를 팔았지만, 지금은 여러 극단과 계약을 맺고 작품들을 동시에 판매하는 전문업체가 성업 중이다. 서울소극장협회의 관계자는 “현재 두 개의 호객전문업체가 20~30명 정도의 사람을 거느리고 영업을 한다”고 말했다. 이들 호객꾼은 월평균 150만~2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지만 ‘간부급’은 1천만 원의 큰돈을 만지기도 한다는 후문이다.

극장 간의 무한경쟁은 ‘제살 깎아먹기 할인’으로 이어진다. 요즘 대학로 연극은 편당 3만 원 정도이지만 각종 할인혜택 등을 내세워 1만~1만5천 원선에서 표를 판매한다. 서울연극센터에서 만난 김모(25) 씨는 “3만 원짜리 공연을 1만 원에 볼 수 있어 좋긴 하지만 뭐가 진짜 가격인지 몰라 개운치는 않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소극장협회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매판매 30%, 당일판매 50%’라는 할인 상한선을 정해놓았다. 그러나 극장 입장에선 많이 파는 게 우선이다 보니 협회의 기준은 허울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협회에서 운영하는 ‘좋은공연안내센터’조차 당일할인을 통해 3만 원짜리 공연티켓을 1만 원 정도 판매하는 일이 많다.

극장 간 출혈경쟁은 무대 위에 올려지는 작품의 수준까지도 결정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가 대세였지만 최근엔 여기에 ‘섹슈얼’(Sexual)이 가미된, ‘섹시 로맨틱 코미디’가 대세라고 한다. 4월 10일 현재 10여 개 극장에서 이런 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다.

섹시 로맨틱 코미디는 포스터부터 꽤나 자극적이다. 〈S다이어리〉 포스터엔 가슴골을 훤히 드러난 배우 사진이 실렸고, 〈발칙한 동거 세 번의 키스〉는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연인의 모습을 담았다. 〈극적인 하룻밤〉과 〈마이 퍼스트 타임〉은 19금(禁) 연극이다.

공연 중 누드 장면이 등장하는 연극은 외설 논란을 부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이즈마케팅’의 일환으로 이용하기도 하다. 〈교수와 여제자〉 연작은 시즌1부터 누드 파문을 일으켰고, 시즌2에는 공연 중 실제 정사 논란으로 주목을 끌었다. 지난 3월부터는 에로배우 에이미가 출연하는 시즌5가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다. 친구와 함께 이 연극을 관람하고 나온 여대생 이모(25) 씨는 “여배우가 벗은 속옷을 다른 배우가 남성관객에게 주는 설정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고 털어놓았다.

〈교수와 여제자〉를 연출한 강철웅 감독은 이러한 외설 시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강 감독은 “나는 한국 관객을 버렸다. 연극계는 노출을 했다는 이유로 내 작품을 외설이라 비난했고, 티켓 판매 사이트는 배너를 띄워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게 해달라’,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들고 일어날 때까지 한국 관객들에게 공연을 보여주지 않거나 아주 비싼 값에 보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 감독은 5월부터는 중국어 대사로 공연을 진행하며 관객도 중국인만 입장시킬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대학로는 스타 배우들의 산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창작 연극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듯하다. 공재민 서울연극협회 정책실장은 “현재 대학로 연극의 70%는 대중 취향을 따라가는 작품”이라고 진단했다. 배우 단체인 ‘50대연기자그룹’에 속해 있는 정상철(67) 씨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웃고 즐기며 힘을 얻어가는 작품도 당연히 필요하다”면서도 “그러나 한쪽에만 치우친 연극계는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상업성만 좇다 보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만 살아남게 된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씨는 순수 창작연극제인 ‘서울연극제’ 공동기획작으로 연극 〈레미제라블〉을 4월 말부터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2011년 처음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춤과 음악에 집중한 같은 제목의 뮤지컬보다 서사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처음 작품을 올릴 때부터 제작비는 한 푼도 없이 시작했다고 한다. ‘50대연기자그룹’ 회원 배우를 주축으로 70여 명이 출연료 없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연극을 끝냈을 때 총 2천만 원의 수익이 발생했지만 각종 비용을 제하고 출연 배우들이 각각 13만 원씩 나눠가졌다고 했다. 서울연극제가 열리는 4~5월에는 창작연극이 무대에 올려져 명맥을 이어가지만 평상시에는 상업적 작품 일색이다.

영화배우로 더 유명해진 대학로 연극판 출신 조재현(49) 씨는 창작연극의 활성화를 위해 종합공연장 ‘수현재씨어터’를 설립해 운영한다. 조씨는 “지금 대학로는 20대를 타깃으로 한 재미 위주의 공연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며 “대학로에 조금 더 다양한 연극이 필요하다. 수현재씨어터를 통해 대학로를 30대부터 50대까지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조씨는 정보석·김갑수·유오성 씨 등과 함께 ‘대학로가 배출한 대스타’로 꼽힌다. 이들은 모두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연기력을 키웠고, 훗날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접수한’ 연기자로 거듭났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조씨는 1991년 연극 〈에쿠우스〉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활약하는 그는 최근 최고 인기리에 방영 중인 사극 〈정도전〉의 주인공을 맡고 있다. 바쁜 스케줄에도 그는 수현재씨어터의 개관작인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직접 출연해 대학로 연극무대에 대한 애정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 정은표·박철민과 함께 트리플캐스팅(하나의 역할에 3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공연에 출연하는 것)으로 주인공 ‘정민’ 역을 맡았다. 조씨는 “영화와 드라마를 하면 벌거벗은 느낌인데, 연극은 나를 돌아보게 해준다”고 말했다.

150개가 넘는 극장이 몰려 있는 대학로는 경쟁이 심화되면서 호객행위도 끊이질 않는다. 혜화역 2번출구 앞에 걸린 호객행위 근절 현수막.


은밀한(?) 제의에 마음 흔들리기도

조재현 씨는 대학로에서도 ‘성공신화’로 존경을 받을 만하다. 소극장 대부분이 임대 형태로 운영되는 현실에서 대학로에서 성장한 배우가 공연장을 세운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씨처럼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작품 한 편의 성공으로 수백만 명의 관객을 유치하는 영화와 달리 규모가 작은 연극에서 큰돈을 벌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컬 배우 고재훈(27·가명) 씨는 지난해 창작연극의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아 두 달 동안 월요일을 제외하고 1주일 내내 공연했다. 이 공연을 위해 그는 무려 7개월 동안 비지땀을 흘렸지만, 그가 출연료로 받은 돈은 고작 80만 원뿐이었다. 5개월 연습기간에 10만 원을 받았고, 두 달 출연료가 70만 원이었다.

그러나 배고픈 연기자가 제작자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출연료를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고씨는 “관객도 별로 없는데다 제작자가 작품을 하느라 빚을 떠안았다는 걸 아는데 출연료를 더 달라고 할 수는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연극무대의 삶이 배고프다 보니 배우들은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젊은 배우인 고씨도 얼마 전에 그런 일을 경험했다.

강남의 한 호스트바 주인이 외모가 출중한 고씨에게 카운터 업무를 제의해온 것이다. 술 접대가 아닌 단순 카운터 업무만 해줘도 월 250만 원을 준다는 제안이었단다. 하지만 고씨는 고민 끝에 거절했다. 배우로서 자존심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한다. “연기가 아닌 다른 일로 그렇게 큰돈을 벌면, 다시는 연기판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극배우의 1년 평균소득은 932만 원이었다. 그마저 온전히 연극만으로 번 수입은 374만 원이고 나머지는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나타났다. 연극판에 발을 디디면 밥 먹기 어렵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연극인들에게는 운명처럼 연극 이외의 부업이 따라다닌다.

대학 졸업 후 첫 출연작품을 연습 중인 전성민(28·가명) 씨는 이제껏 편의점, 주유소, 술집 종업원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그는 “작품이 확정되면 일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서 짬짜미 부업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같이 연극을 하는 또래 친구들도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했다. 언제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지 모르기 때문에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는 신세다. 아예 돈이 떨어지면 작심하고 몇 개월씩 연극판을 떠나 ‘외도’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오기도 한다.

이런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왜 배우들은 불나방처럼 무대에 오르려고 하는 걸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한마디로 “좋아서 한다”는 것이다. 40여 년간 연극 무대를 누빈 정상철(67) 씨는 “배우로서의 삶이 힘겹지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먹고 사니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만 배우는 꿈을 먹고 산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우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대학로로 몰려들지만 그 길은 고통을 수반한다. ‘대학로12길’을 나타내는 도로명주소 표지판.

“스타가 목적이라면 배우로 살기 어렵다”

하지만 정씨는 정작 연극을 갓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는 “그만 둘 거면 지금 그만두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단다.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 처음 “배우를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때도 그는 “하늘이 다 노래졌다”고 고백했다.

아들 희중(32) 씨는 어릴 적에는 생활이 불규칙한 아버지를 보면서 배우란 직업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연극반 친구의 영향으로 연극을 보러 다니면서 아버지를 따라 배우의 꿈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결국 아들의 굳은 결심에 승복하고 말았다.

희중 씨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강풀의 순정만화〉에 출연하는 등 대학로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연극무대에 서면서 아버지가 연기를 그토록 반대한 이유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대학로 생활을 5년 넘게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말씀하신 경제적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연기에 대한 고민 등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정씨는 어엿한 배우로 성장한 아들에게 선배 배우로서 “이제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준다.

정씨는 “연기의 목적이 스타가 되는 것이라면 이 바닥에서 버틸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스타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시기와 운이 따라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은 스타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대에 서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배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에서 연극인들은 고달프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지만 ‘꿈만 좇는 가난한 연극인’이라는 사회적 시선이 더욱 견디기 힘들다. 취재 중 만난 많은 연극인은 “세상에 예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삭막해질 것”이라며 “우리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민국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 곳곳에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말이 연극인들의 현실과 고민이 담긴 ‘고요한’ 외침으로 들린다.

글 이윤식 인턴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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