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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조선 왕들, 사고 나면 “내 탓” … 민심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져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범사도’. 철종 때인 1856년 김계운이 대마도에 사행(使行)을 다녀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모습을 1858년 8월 유숙(劉淑·1827~1873)이 그렸다. 폭풍에 휘말리고 돛이 부러져 나가는 절박한 상황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세월호 사건을 보면 역사는 반복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고가 난 지 2주가 넘도록 실종자 가운데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하고 나라는 우울한 터널에 갇혀 있다. 출구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몇백 년 전에도 그랬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고, 관리들은 나 몰라라 했다. 나라는 엉성했다. 시간은 흘러 슬픔의 상처는 그럭저럭 메워졌지만 어리석음은 반복됐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드는 마음으로 조선의 재난사를 살폈다.

1718년 숙종 44년 10월 28일 밤. 과거시험이 끝나 팽팽하던 한성(漢城)의 분위기가 한잔 술에 느슨해진 어스름 저녁. 캄캄한 한강에서 돌연 비명이 터졌다. 과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 선비 80여 명과 백성의 비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강 건너기를 서두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태운 탓이다. 근근이 강으로 나간 배는 무게를 못 이기고 전복됐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강변에는 별장(別將·나루의 수비 임무를 맡는 종9품 무관)과 사격(沙格·사공의 일을 거드는 선원)이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100여 명이 죽었다. 당시 인구를 지금의 3분의 1로 잡고 단순화하면 오늘로 치면 300여 명쯤 사망한 것이다. 세월호의 사망·실종자 수와 이렇게 비슷한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게다가 지금 해경의 업무와 비슷한 별장의 대응마저 한심하다(『조선왕조실록』참조).

세월호 사고 현장. 조선에서라면 희생자를 위해 초혼제를 지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이에 수찬(修撰) 김상옥이 상소했다.

 “이번에 거자(擧子·과거를 본 사람) 80여 인이 한강 나루를 건너다가 일시에 빠져 죽었습니다…진선(津船)의 별장 및 사격의 무리가 끝내 구제할 뜻이 없었으니, 정상이 절통합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하게 구핵(究?:조사와 처벌)하고 형신(刑訊)해서 정배(定配)시키소서…더러 숙질과 형제가 배를 탔다가 함께 빠져 죽은 자도 있을 것이니, 원통하게 맺힌 기운이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하기에 충분합니다. 담당 부서로 하여금 별도로 치제(致祭)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숙종은 답했다.

 “1백 명의 거자가 일시에 물에 빠져 죽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사격 무리의 잘못을 엄중하게 구핵하는 일은 모두 상소한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하되, 치제하는 한 가지 사항은 품처하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한강에 단을 만들고 제를 지내도록 했다.

 이 사건은 190여 년 전 한강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비극이었다.

 1524년 중종 19년 10월 2일, 한강 양화도에서 배가 뒤집혀 80여 명이 죽었다. 구조선도 오지 않았다. 나흘 뒤 사고가 조정에 늑장 접수되자 임금은 의금부에 도승(渡丞·나루터를 관리하던 종9품 벼슬)과 사선(개인 배)을 운행하는 자를 추문하라고 했다. 사헌부에 관선(官船)이 있었다면 사람을 구할 수 있었는데 왜 그날 관선이 없었는지도 조사하라고 했다. 원래 양화도에는 관선과 사선이 한 척씩 있었는데 그날 따라 관선이 없었다.

 사건 닷새째 보고가 들어왔다. 빠져 죽은 이가 30여 명이라는데 믿을 수 없어 오부(범법 사건, 화재·수비 등을 관장하던 한성의 다섯 관아)를 시켜 찾고 있다는 것과 사선을 운행하는 자도 구조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중종·숙종 때 대규모 선박 전복 사고
침몰 사고 발생 이레째인 10월 9일 중종의 석강(夕講) 자리에서 시강관 황효헌은 “신이 마침 강을 건너다 보니 물가에 주검을 빈렴(殯殮)하면서 곡하고, 주검을 실어 가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았습니다…빠진 자는 80여 명인데 건져낸 자는 겨우 30명이니 이는 큰 변입니다”라고 했다. 특진관 황맹헌은 “건져낸 수가 매우 적어 소문과 같지 않습니다. 듣건대 내금위도 빠져 죽어 그 아내가 가서 곡한다 하니 더욱 참혹합니다”라고 했다.

 어떤가. 비참한 모습이 지금 맹골수도의 비극과 빼듯이 닮지 않았는가. 나루터 관리자인 도승, 사설 선박업자인 사선 운행자, 공조의 관리, 사공, 이들의 안전 불감증이 뭉쳐 자아낸 인재였다.

 재난을 수습하는 관리의 몸가짐은 또 어떠해야 하는가. 역시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종 13년 경기 진휼 순찰사 강희맹을 추국하는 일이 있었다(『성종실록』 권 138). 어명은 경기지역의 재해를 조사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명 7일 뒤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 송영 등 5인이 성종과 윤대(輪對)하는 자리에서 비판을 제기했다. 수행 인원 61명, 말 26필로 진휼사의 행차가 너무 요란하다는 것이었다. 3일 뒤 강희맹은 진휼보고서와 함께 ‘알려진 것과 달리 말 12필, 수행인원 28명?이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그를 교체했다.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할 이가 잘못된 몸가짐을 한 데 대한 꾸짖음인 것이다. 진도 팽목항에서 드러난 일부 공직자의 처신을 떠올리게 한다.

 안타깝지만 재난은 인간의 숙명이다. 조선시대에도 지진·가뭄·풍수해·화재·이상 기후 등 재난이 그칠 날이 없었다. 선박 침몰 같은 인적 재해도 있지만 천재지변도 많았다. 호원대 사회복지학과 배점모 교수의 ‘고려 및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재난구호(휼)정책’ 논문(2007년)에 따르면 조선시대엔 기근 419회, 역질 329회, 수해 322회, 호랑이 피해 194회, 화재 166회, 유망(流亡) 82회, 한해 78회, 지진 69회, 도적 44회, 벼락 43회, 우박 38회, 환곡(還穀) 폐해 32회, 풍해(風害) 30회, 서리 21회가 있었다.

 재난은 사람들을 슬픔과 충격에 빠뜨리고 오래가면 분노로 변한다. ‘분노한 민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배 교수에 따르면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각종 재난 구휼이 실시됐다. 조세 감면 539회, 진휼·휼전(賑恤·恤典) 512회, 왕행견사위문(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것) 212회, 설죽(굶주린 자에게 죽 제공)·시음식(施飮食·굶주린 자에게 음식 제공)·설진(진휼을 위한 기관 설치) 207회, 내수사(왕실 재정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설치 등 183회, 환곡 감면 150회 등이다.

임금이 보낸 수습특사 212차례
그런데 왕별로 보면 특징이 있다. 고려대 김순남의 ‘조선 초기 진휼사신의 파견과 진휼청의 설치’ 논문(2007년)에 따르면 조선 초기 정종~성종 기간엔 약 50회 진휼 경차관(당하관급 봉명사신)이 파견됐다. 그런데 세종 때 40여 회로 집중된다. 재위 4년 차에는 12회나 됐다. 다른 왕들이 안 보낸 것은 아니지만 횟수가 적었다. 경차관의 일을 대신하는 재상급의 진휼사 파견은 후대에 많아지는데 성종은 18회를 보냈다. 조선 최고의 왕인 세종과 조선을 안정기에 올린 성종 시절 진휼 활동이 많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민심을 잘 아우르는 왕이 훌륭한 임금이란 의미 아닐까.

 임금은 나아가 뭐가 잘못돼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의견을 구해야 했다.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충고하도록 하는 구언(求言)이다. 근신도 빠질 수 없다. 금주, 감선(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임)은 물론이고 거처도 불편한 곳으로 옮겼다. 모두 백성과 고통을 함께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최고 결정권자인 왕에게 슬픔과 충격에 빠진 백성의 마음을 위무하는 것은 중요했다. 조선조 전체의 진휼 조치가 512회인데 왕이 신하를 보내 위로하는 경우가 212회였다. 두 번 재난에 한 번은 왕이 나서 마음을 달랜 것이다.

 왕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초혼제도 지냈다. 인조 18년(1640) 2월 27일, 충청도 배 6척이 평안도 영유현 앞바다에서 난파됐다. 영선장인 충청도 수군우후(水軍虞侯) 한질과 소근첨사(所斤僉使) 최덕인 이하 112명이 물에 빠져 죽거나 실종됐다. 며칠 뒤 충청도의 배 12척이 또 난파돼 119명이 죽었다. 경상도 김해와 울산의 배 2척 역시 난파됐다. 모두 나라 일로 왕명에 따라 청나라로 향하던 배였다. 이조판서 이경석은 희생자를 위한 초혼제를 건의했다.

 세종은 이 점에서도 돋보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초혼제를 검색하면 모두 16회. 그중 세종 때 7회 있었다. 1424년 세종은 ‘왜적에게 패전하고 군관이 살해되고 선졸 4명이 물에 빠진 일’이 보고되자 초혼제를 지내게 했다. 또 일본 회례사 박안신이 거느리고 간 선군(船軍) 중 사망한 16명의 초혼제도 지내게 했다. 1425년 세종 7년 무릉도 입항 때 파선돼 죽은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를 지내게 했다. 1433년 세종 15년 파저강 전투에 출전했다 죽은 전사자에 대한 초혼제를 지내게 하고 군관·군졸 등을 복호시키라고 했다. 1447년 세종 12년 때에는 “보리 종자를 운반하던 조전선이 바람을 만나 익사한 사람들에게 초혼제를 지내주고, 그들의 집에 쌀과 콩을 한 섬씩 주라”고 명했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리더십이 뛰어난 세종의 모습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재난의 원인은 ‘왕의 부덕의 소치’로 여겼다. ‘천견설(天譴說)’, 하늘이 견책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인조 18년(1640) 연속된 선박 난파 사건에 왕이 물었다. “…내가 덕이 없어…배를 타고 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니 애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재변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면 하늘이 내리는 견책에 답할 수 있겠는가?”

 우의정 강석기가 아뢨다.

 “어찌 다른 조처가 있겠습니까…하늘이 견책을 내리는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자 해서이니 더욱더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효종 5년(1654) 7월 8일 조익은 ‘오직 성심을 쏟고 힘껏 실천하며 어진이를 등용해 재변에 대응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의 재난 대응은 혼란스럽다. 진휼을 열심히 했고 왕도 하늘의 뜻을 두려워했지만 사고를 예방하는 지혜로 발전하진 못했다.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듯하다. 과연 오늘날은 그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

 그럼에도 위대한 왕의 지혜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성군(聖君)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민심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져라’. 세종대왕이 그러지 않았는가.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이승률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root@asanins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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