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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여성 먼저 대피시킨 승객들 … 세월호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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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앞으로 넘어졌어요.”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김선영(24)씨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렸다. 을지로4가역에서 지하철을 탄 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열차가 신당역을 출발해 상왕십리역에 거의 진입하던 순간, 김씨는 충격으로 넘어져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제 다리를 깔고 넘어지는 통에 얼른 일어서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객차 안은 실내등이 모두 나가 암흑으로 변했다. 최근 세월호 사고 때문인지 열차 안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씨는 넘어지면서 무릎과 손목을 바닥에 심하게 부딪혔다. 통증이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캄캄하던 객차 안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전등 삼아 이곳저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곧이어 “침착합시다” “괜찮아요”라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3분쯤 지났을까. “기관 고장으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김씨를 포함해 겨우 몸을 추스른 승객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기다렸다. 일부는 의자에 앉아서 또 일부는 객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김씨는 “처음에는 기다리다가 누군가가 객차 문을 열자 한 사람씩 선로로 뛰어내려 현장을 빠져나왔다”며 “사람들은 상당히 침착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탄 회사원 박모(54)씨는 “앞 칸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방송이 다시 나왔다”며 “하지만 앞 객차와 연결된 문이 심하게 찌그러져서 열리지 않아 이동할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일부 승객은 객차 안에 비치된 비상 대피 매뉴얼을 보고 수동으로 문을 열었다. 반대편 선로 쪽 문이 먼저 열렸다. 그때 누군가가 “열차가 진입할지 모르니 나가면 안 돼요!”라고 소리쳤다.

 사고 후 5분 정도 지나자 반대편 선로에서 상왕십리역으로 열차 한 대가 서서히 들어왔다. 사고 소식을 이미 들었기 때문인지 열차는 역에 멈춘 채 헤드라이트를 선로에 비췄다. 터널 안이 환해지자 승객들은 열린 문으로 하나 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젊은 남성 승객들이 어린아이·여성·노인 순으로 대피를 시켰다. 박씨는 “나를 포함해 남자들이 제일 마지막에 객차를 빠져나왔다”며 “세월호 침몰사건 영향 때문인지 젊은이들이 아이와 노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질서 있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고현석(24)씨는 “처음엔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침몰사고 생각이 떠올라 겁이 났지만 누군가 ‘진정하세요’라고 외친 뒤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객차에서 선로 바닥까지 1m가 넘는 높이였지만 고씨를 포함한 남자 승객들이 먼저 뛰어내린 뒤 여자들과 노인들이 안전하게 나오는 것을 도왔다. 고씨가 탄 객차와 뒤 객차는 연결 부분이 끊어진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고 충격으로 허리를 삐끗한 김시산(20)씨는 “내가 있던 객차 승객들은 다른 칸보다 일찍 빠져나왔다”며 “사고 직후 대피방송이 나오지 않자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며 선로로 걸어 나왔다”고 했다.

 이번 사고로 병원을 찾은 승객 240여 명 대부분은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다. 이 중 열차 기관사 엄모(45)씨는 오른쪽 어깨가 골절돼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다.서울성동경찰서는 엄씨의 상태가 회복되는 대로 사고 원인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승객 중에는 80대와 40대 후반의 남성이 각각 쇄골 골절과 뇌출혈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선영·구혜진·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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