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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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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그는 오래도록 교육적 차원에서 아이를 야단치는 것과 자기 분노를 아이에게 집어던지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아이에게 교육적 행동 지침을 내리는 것과 자기 불안 때문에 아이를 통제하는 것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아이가 두 가지 물건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 망설일 때, 어떤 사실을 부모에게 숨기다가 들통났을 때, 그때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한 채 소리만 질렀다.

그는 사춘기가 되어 분노를 폭발시키며 반항하는 아들 덕분에 자기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의 중요한 성장기에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이에게 사랑과 함께 어떤 독을 건넸는지 알아차렸다. 내면을 보고 행동을 고쳐나가며 아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아빠가 잘못했다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하면서 오래도록 아들의 분노를 받아주고 참아주었다. 아이의 분노는 점차 누그러들었지만 내면에 불편하고 딱딱한 감정의 핵 같은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세월호 희생 아이들을 보며 많이 울었다. 아이들은 아들과 나이가 같았다. 아이들이 자기처럼 어리석고 불안한 어른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자기 이익 앞에서 도덕이나 양심을 쉽게 저버리는 이기적이고 결핍된 기성세대들이 아이들을 희생시켜서, 우리 모두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과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세월호 선장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아들이 자기의 나쁜 양육 방식 때문에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아들과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아차렸다. 아들이 또래들의 희생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은 자기 슬픔을 분노로써 표현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아들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그 선장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분노할 때 그 고갱이에는 양육자인 자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핵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앞으로도 아들에게 더 많이 사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워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실존의 깊은 뿌리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조차 수치심과 죄의식이 끈적하게 뒤섞인 내면을 외면하면서 진실을 회피한다. 그런 남자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자신과 가족, 우리 사회에 축복으로 보인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