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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종군위안부 '제3의 목소리'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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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노재현 기자 중앙일보 부장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지난주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속 시원한 소리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한 기자회견(25일)에서 한 기자가 “어제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런 역사 인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야스쿠니 아닌 종군위안부 문제를 들어 답변했다. “한국의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일은 끔찍하고(terrible) 지독한(egregious) 인권침해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며 “여성들은 전쟁 중이었다고 해도, 충격적인 방식으로 성폭행당했다”고 말했다. 일본 측을 다독이며 자세 변화를 촉구하는 듯한 말도 했다. “나는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인들이 과거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인식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24년간 사재를 털어가며 종군위안부 문제에 매달려 온 김문숙(86) 부산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장도 오바마가 속 시원하다고 평가한다. “오바마가 강하게 얘기하니까 일본인들이 쏙 들어가지 않았나.” 미국 국내에서야 얻은 게 없는 아시아 순방이었다고 비판받을지 몰라도, 오바마는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샀다.

 적어도 종군위안부에 관한 한 일본은 수세(守勢)일 수밖에 없다.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유무만 해도 아무리 “협의(狹義)의 강제성을 뒷받침할 증언은 없었지만 광의(廣義)의 강제성은 있었을 것”(아베 총리)이라고 설명해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교묘한 책임회피로 들리기 십상이다. 일본 우익에서 나오는 ‘매춘부’ 같은 희한한 발언이 더해지면 구제불능이라는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종군위안부같이 여러 측면이 겹쳐 있는 문제를 일본(또는 옛 일본제국주의)이라는 단 하나 대상에 집약시키고 시간이 갈수록 분노만 응축시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물타기’라는 지청구가 들려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솔직히 의문이 생긴다. 물타기가 아니라 상황을 보다 정확히 보자는 말이니까. 오바마가 25일 회견에서 언급한 “(종군위안부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한·일 간에는 적지 않은 시각차와 오해가 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마저 선입견과 팩트를 뒤섞어 다루는 경우가 있다.

 사태의 모든 것을 가해자에게 집약시키면 대상이 명료해지고, 또렷한 우적(友敵)관계를 바탕으로 공격만 퍼부으면 된다. 상대의 모든 설명은 부질없는 발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상황이 수십 년 지속되면 상대국의 중도적·중간층 시민들조차 서서히 의문을 품게 된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이런 면이 없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종군위안부에 관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일본이 확실하게 이어가야 하며, 정부 차원의 책임 인정과 사죄, 정부 예산을 들인 보상이 새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피해자인 우리로서는 이 문제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논의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성 차별 측면이다. 종군위안부는 식민지 지배 치하에서 여성이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은 경우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희생됐는지를 살피고 따져야 한다. 계급 차별도 있다. 이화여대를 나온 김문숙 회장이 “위안부 문제는 바로 내 시대의 일이었다. 나는 그나마 학교도 다니고 도회지에 살아 모면했는데, 할머니들은 공장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꼬임에 빠져 당했다”며 가슴 아파하는 이유다. 전시 성노예 측면도 보아야 한다. 종군위안부 동원에 개입·협력한 한국인들이 누군지도 찾아내 늦게라도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한국인 남성이 ‘일제’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무능력과 비겁함을 감추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어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에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위안부 지원단체가 주장하는 ‘일본 내 입법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해 “생존 할머니가 55명밖에 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계속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할머니들에게 ‘해결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포지엄 명칭처럼 종군위안부 문제는 이제 다양한 ‘제3의 목소리’들이 나와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는 아마 우리 시대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당대에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지금은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다. 이 문제로 한·일관계 전체가 동결되는 상황을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바깥의 가해자 못지않게 우리 안의 가해자도 파헤쳐야 하며, 시야를 더 넓혀서 객관성과 국제성을 확보해 나갔으면 한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