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원효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편집자 주>
지난 한해동안 애독해 주신「한국사대토론」은 새해의 새 기획에 의해『5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슬기』로 개 제,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표제가 암시하듯 이 기획 물은 선 조들의 면모와 생애를 통해 오늘의 세대들에게 진취적인 정신과 삶의 자세를 교훈 하려는데 뜻이 있습니다.
『일절무애인 일도출생사』-『세상 모든 일에 거리낄 것 없는 사람(부처)이라야 한 길로 번뇌로 가득 찬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지금부터 1천3백30년 전 서라벌(지금의 경주)의 큰 거리에서 현대의 한국인에게도 커다란 감화를 주고 있는 원효대사가 춤을 추며 부르던 노래의 한 구절이다.
『무애가』로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불교의 기본적인 사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5천년을 살아온 한민족에게 굵다란 한 줄기의 슬기로 계승되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한 원효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불교의 전 경전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사부대중(비구·비구니·신남·신녀)에게 세 법한 인물이다.
불교는 서기 3백72년 고구려에 처음 전래되고 신라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서기 5백27년에야 비로소 공인됐다. 그후 불교는 신라의 국교가 되어 삼국통일, 신라문화의 밑바탕을 이루며 번창, 발전을 거듭했다.
불교가 공인된 후 꼭 90년이 되는 해 신라불교를 ▲소승에서 대승으로 ▲중국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원효대사가 태어났다.
진평왕 39년의 어느 날 압양군의 남불지촌 율곡 마을(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에서 한 부인이 귀가하던 중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됐다. 이때 태어난 아기가 나마설담날의 아들로 또는 신라의 유학자 설총의 부로 널리 알려진 원효대사(본명은 서당 또는 신당)이다.
원효는 29세가 되어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에서 출가하기 전까지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화랑의 연 무를 익히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와 사회상은 젊은이들을 낭만적인 낭도로만 놓아두지는 않았다.
원효가 태어난 때 신라는 불교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려는 정복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북으로는 고구려, 서남쪽으로는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오던 신라는 이 같은 외환을 떨치기 위해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했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진평왕 때의 여러 번에 걸친 반란으로 내부에 정치적 갈등이 생겨 선덕·진덕으로 이어지는 여왕의 정치가 계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국내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까지 성골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왕통을 진골인 김춘추를 무열왕으로 추대, 외교를 중심으로 삼국통일의 의지를 확실히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 원효의 생전에는 빈번한 통일전쟁을 거쳐 백제·고구려를 병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사회의 사상적 기반이 됐었던 불교도 최고 번성 기를 누리게 됐다.
이 같은 불교의 번성은 원효에게 깊은 영형은 물론, 당시의 불교사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느낀 원효는 불교의 참 진리를 깨치기 위해 당으로 구법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그는 진덕여왕 4년(650년) 그의 나이 34세 때 당나라로 출발했으나 고구려의 병정에게 신라의 간첩으로 오해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후 원효는 통합된 백제 땅을 거쳐 다시 당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의상과 함께 서해안에 도착한 원효는 그곳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어느 날밤 토굴에서 잠을 자던 중 몹시 갈증을 느껴 물을 찾게 되었다. 우연히 근처에서 바가지를 발견, 거기 괸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 보니 그 물은 해골에 먼지가 뒤범벅이 된 채 차 있었던 빗물이고 그들이 잠잤던 집도 옛 무덤 속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원효가 심한 구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순간 원효에게는 대오가 있었으니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일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가지가지 일도 사라지니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는 것이었다.
결국 일찍이 석가가『천상천하유아독존』(천상천하에는 오직 나뿐이로다)이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원리임을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깨친 것이었다. 정과 부정, 호와 부호, 선과 불 선의 모든 분별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보물 그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같은 대오는 꼭 중국에만 가야 도를 깨치는 것이 아님을 원효는 스스로 체득하게 됐다.
이 결과 원효는 평생을 자기 스스로 깨닫는 길을 걷고자 맹세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한가지 학문에만 얽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 미련 없이 홀로 서라벌에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학구생활, 수도생활, 국민계몽생활에까지도 정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원효의 이와 같은 사상은 필경 한국인의 심성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범사에 의연하고 초탈하는 정신의 자세야말로 한국민족이 역사의 굴곡을 견뎌 살아가게 한 슬기인지도 모른다.
구법 하러 당나라로 가던 발길을 돌리고 길가에서 춤을 추며『무애가』를 부르고『나무아미타불』을 외도록 권하는 원효의 행적은 당시의 신라인들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때는 분황사나 무애당에서 참선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때에는 거리를 방황하는 걸인들 속에서 원효가 발견되기도 했다.
따라서 형식에 치우쳤던 당시의 승려들은 그를 멸시하고 그의 언행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불교의 진리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원효와는 대담하길 꺼렸다. 아무도 그의 심오한 학식과 걸림 없는 자비 행을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효의 대표적인 불교이론은『대승기신론』과『금강삼매경론』등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금강삼매경론』의 저술과 관련된 원효의 이론과 일화는 그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 보인다.
어느 해엔 가 왕비가 불치의 병에 걸려 왕은 사신을 국내 국외로 보내 양 약과 명의를 구하게 했다. 한 사신이 용왕이 보내 준 불경 한 권을 가지고 왔다. 『금강삼매경』으로 알려진 이 경전은 당나라에서도 출간된 지 얼마 안 되는 신간 불서였다. 왕은 이 경전의 설법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금강삼매경을 설법할 수 있는 대사가 없었다. 이때 용왕의 권고대로 대안법사에게 흩어진 책장들을 잘 맞추도록 하고 원효에게 그 주석을 쓰도록 부탁했다.
원효는 왕이 마련한 소를 타고 두 뿔 위에 필연을 놓고『금강삼매경론』5권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바로 황룡사에서 대법회가 열리는 전날 야「약소」5권을 훔쳐 없애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원효는 밤을 새워 약소 3권을 다시 저술했다.
『금강삼매경』은 귀일심원의 최후경지를 밝혀 주는 경으로 일심의 양원에로 돌아가는 삼매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그 설법을 듣고 왕비의 병은 즉시에 나았으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청중들은 한결같이 찬탄의 소리를 금하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원효는 명성과 찬양이 수도자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원효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찬양이 불교의 근본정신인「공」과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원효가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 또는 복성 거사라고 자처하면서 오직 그 모든 능력을 국리민복을 위해 바치려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가 요석공주를 맞아 스님으로서의 계율을 파한 가장 중요한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그의 파계는 원효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원효는 인생의 최고 목표를「공의 완전한 추구」로 규정했다. 따라서 그는 대사로서 왕에게 떠받들어지는 것도, 대설법가로 민중의 추앙을 받아 성지처럼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안에서「이입」과「행입」이란 두 가지 중요한 이론을 제기했다. 이것은「이입설」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중국 선사상의 근본이 되었는데「이입」이 이치를 깨닫는 길을 말하는 것이라면,「행입」은 실생활 속에서 그 깨달은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원효가 한창 경론의 이론적 공부만 할 때에는 이「이입」의 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런 단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자재하게 많은 사람들을 참사람 되도록 가르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열반이나 극락이 이 현실과 따로 떨어진 어느 먼 고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성인이라는 사람이 똑 어떤 특수한 모양과 특수한 위엄을 부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상생활, 먹고 입고 말하고 일하고 자고 일어나고 하는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장소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물건에 대해서나 항상 마찰과 대립을 일삼지 않고 하나가 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하는 일을「화쟁」이라 하고 또 「원융회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 싸울 건더기가 없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이 이 세상이다. 본래가 「하나」이었다. 바른 마음, 사심 없는 마음가짐,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마음만 가지면 그 때에 그런 세계가 당장 그 자리에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거기가 바로 불국토요, 극 악이요, 열반의 세계다.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것, 모든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것, 내 재산과 내 재간과 힘과 지혜와 지식과 열정과 그 모든 것을 오로지 이러한 큰 목적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다는 것, 그만한 각오가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또 없다고 원효는 생각하였고 가르쳤고 실천하였다. 그것을 어렵게 말하자면「귀일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원효는「요익유정」또는「요익중생」이라는 이 한가지 염원으로 70평생을 살았다. 나와 남이, 그리고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남남이 아니다.「유정」이라고 하고 「중생」이라고 하는 낱말은 생명이 있고, 이성이 있고, 인정이 있고, 의욕이 있고, 또 능력이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다만 그 생각이 아직 온전히 깨끗하고 맑지 못하여 사리사욕을 탐내고, 시기 질투하고, 남을 해칠 생각만 하고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중생이니 유정이니 라고 불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니 유정이니 하는 존재들은 그 생명과 이성과 인정과 의욕과 능력이 온전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개, 돼지 같은 중생도 있고, 아귀다툼을 하는 사람 같지 못한 중생이 많다. 그러한 중생들 때문에 그들이 사는 세계가 어지럽고 험악한 것이다.
원효는 싸움 많은 세계, 불행한 세계, 빈부의 차별이 있는 세계가 다 사람들 마음 하나 잘못 쓴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마음을 바로 잡기만 하면 딴 세계가 나타난다고 그는 일생동안 외치고 그렇게 하다가 간 사람이다. 그것이「요익유정」이다. 그것이「홍익인간」이다. 우리는 1천3백60년 후의 우리들이 또 행복한 줄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도 또한 이러한 조상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스승의 목소리를 지금도 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