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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단편소설 당선작|빛깔과 냄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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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이 인간들아>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운경이가 대학을 갓 들어갔을 무렵, 서울 친구를 따라 명동 구경을 나왔던 어느 날, 「딸라 골목」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밀리고 밀리다가 어느 가게 안으로 쓰러지듯틀어 박힌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밖으로 진열해 놓은 가죽잠바들 속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어느 가게주인 무르팍에 운경이가 털썩 주저앉아 버릴 수밖엔 없었는데, 바로 그때 그. 남자 주인이 어유, 이 인간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었다.
운경이는 이 날 어찌나 당황했던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도망치듯 딸라 골목을 뛰쳐나와 왜 그러니, 왜 그러니, 하고 자꾸만 묻는 친구와 겨우 작별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이 인간들아, 하는 소리가 잊혀지지 앉아 잠이 오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의 무릎에 겹친다는 것조차 상상못했던 운경이가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던 어떤 남자의 무르팍에 허락도 없이 예고도 없이 털썩 주저 앉은데다가, 그것에 대한 반응이 저주같을 수밖엔 없는 이 인간들아, 라는 외침이었으니 잠이 안올 법도 한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운경이는 좀체로 명동이란 곳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기억이 어느 정도 가시기 시작한 후에야 외국어 교재를 구할 일이 있어 잠시 들렀었다. 그 날도 역시 사람들은 명동바닥 안에서 빈틈없이 붐볐고, 불과 1 2백 미터에 불과한 그 골목을 지나는 동안 어깨며 허리깨를 얼마나 박치기 당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
그날 운경이는 그 골목을 기웃기웃하면서 자기가 낯선 남자의 무릎에 주저앉아 피해자 건 가해자건 서로가 봉변을 당했던 가게가 어디인지를 찾아보았으나, 이 가게가 그 가게인 것 잡고, 그 가게가 이 가게인 것 같아 둘러보는 동안 벌써 딸라 골목이 끝나는 외국어 테이프 상회에 다다라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가게를 기웃거리는 동안 운경이는 우연히도 그 조그맣고 마치 성냥팍같은 상점안에 하나 훅은 둘씩 꼭꼭 박혀있는 주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참 재미난 경험이었다.
가격이 워낙 터무니없이 비싸서인지, 손님들은 가격만 묻고는 그냥 지나쳐버려 흥정하는 손님이 별로 없으므로 할 일이 없는 주인들은 아예 의자를 길가 쪽으로 향해 놓고 앉아서 오가는 아가씨들을 구경하며 한마디씩 농을 걸고 있었고, 그들은 여기에 퍽 재미를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철망도 쳐져있지 않은 곳에 하루종일, 일년 삼백육십오일, 끊이지 않고 관람석 앞을 지나가 주는 훌륭한 구경거리, 그것은 마치 철망이 쳐져있지 않은 창경원에 들어가 호랑이도 바로 곁에서 구경하고 기린도 보고 토끼도 만져보고 할 수 있는 기이한 구경거리와 같은 일은 아닐까.
그래서 잠시동안 그것 참 재미난 일이겠다, 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운경이 자신이 그 입장이라고 가정해 보았을 때 그건 또 얼마나 끔찍하도록 지루한 일일까를 곧 알 것 같았다.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스쳐 지나가기는 하나, 이 구경거리는 결국 모두가 같은 인간이란 점에서 하나도 호기심일 것이 없는 일이 아닐까.
오히려 상점 주인들이 스스로 철망도 없는 창경원에 들어와 앉아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사람 진열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진열되어주는 덕분에 먹고 자고 입을 수 있어서 청춘도 낭만도 다 갈아버리고 이 성냥 곽 같은 가게구멍에 꼭꼭 틀어박혀 시간을 파먹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피차간에 상대방을 구경거리라고 여길 수가 있지만, 진열되어진 상태에서 구경을 해야하는 이들이 홍수감이 밀려드는 인파를 보면서 이 인간들아, 하고 소리지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이후로 운경이는 인간들 속에 휩쓸고는 것이 왠지 하나도 두렵지 않아졌고 또 인간들아, 하는 욕지거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나서 오늘까지도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밀치고 박찰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숱한 인간들은 도대체 누가 낳아놓는 것인지, 사람의 무리를 보면 그들이 마치 동의(동의)도 하지 않고 동의되어진 약자들 같아 .연민이 몰려든 특가도, 그들이 모두가 동의도 않는 생명을 낳아 놓는 여자와 남자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들이 마치 이중인격자들 같아져서 운경이가 사람의 무리속에서 밀쳐지고 박처질 때 때로는 연민으로 때로는 비웃음으로 밀치고 박치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 인간들아, 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어가는 것이다.

<밤 10시, 3등 열차.>
운경이는 서울행 만원열차에 실려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케케묵은 사람들의 냄새, 북적대며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밀치고 받히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몸짓.
이들은 모두가 어디로부터 떠나와 어디로 가고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서울 올라가는 막차가 연착했다길래 처녀아이가 낯선 시골 마을에서 두려움에 질려 하룻밤을 지새지 않아도 되니까 신이 나서 냄새나는 열차에 뛰어 올라 탄 것 뿐, 어디서 출발한 차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차안의 복잡한 모습, 그리고 조그만 시골역에도 쉬었다는 점이 3등 열차임에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헐어빠진 완행열차가 조그만 역에 덜거덩 하고 점거할 매마다 데구루루 하고 구르는 콜라병 소줏병 소리의 숫자를 미루어 보건대 이 차는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부산 발 청량리행 열차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거나 아니면 의자에 기대어 선채 꼬박꼬박 줄고 있는데, 아직도 한 두군데에서 술 취한 사내들이 겸상도 사투리에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떠들고 있다.
부산에서 떠났으면 어떻고 목포에서 떠났으면 어때 한시간 삼십분 후에 서울에 닿기만 하면 되지.
그들과 주어진 시간동안만 함께 이 열차를 타면 끝이다. 어서 시간이 가야한다. 운경이는 피로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더러운 냄새 속에서 빨러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깨끗한 것끼리 모인다고 더 깨끗해지는 것은 분명 아닌데 더러운 것끼리 모이면 꽤 더 더러워지는지 알 수없는 일이다. 이 인간들은 왜 더러워서 나룰 불쾌하게 하는가.
운경이는 몹시도 피곤했다. 지쳐빠진 몸 같아선 운경이도 열차안 사람들처럼 입음 헤벌리고 잠이 들거나 참새들처럼 꼬박꼬박 졸고만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졸아대면 누군가가 곁에서 이 인간아, 하고 소리를 질러댈 것 같아 뻑뻑한 눈을 비벼 뜨면서 있는 것이다.
석간 신문은-. 오늘 저녁 석간, 기사특보….
운경이는 50원을 구고 신문 두 가지를 샀다. 이것도 막장이어서 십원이 싼 모앙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내가 없는 서울 바닥에서 인간들은 또 어떻게 살았는지 보자고 신문을 펼쳤다.
어찌 보면 어린이 신문 같기도 하고 주간잡지 같기도 하고 아니면 총무처 인사 게시판, 외국의 선거 속보만 잡기도 한 신문의 톱기사를 올려다보니 한강에 희귀새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신문을 매일 안보면 어때.
그래서 운경이는 신문을 아무렇게나 접어서 어디다 넣을까 두리번대다가 남자들처럼 뒷주머니에 꿰어찰 수도 없고 페이지 수로 치자면 무려 십육 페이지에 이르는 신문을 여자 가방에 넣을 수도 없고 해서 결국 그냥 들고 있자고 작정을 했다.
그러고 나니 운경이는 공연히 신문장수와 복잡한 사람들 틈새에서 주머니를 뒤적이고 가방을 뒤적이다가 작은 돈이 없어 천원짜리를 주고 돈을 거스르거니 신문을 받거니 하면서 법석을 떠는 동안 무슨 여자가 기찻간에서 신문을 다 본담, 하고 시골 사람들 눈총을 받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녀석 신문장수, 거짓맡장이쟎아. 기사특보는 무슨 기사특보람.
그러다 보니 이번엔 홍익회 모자를 쓰고 완장을 두른 판매원이 콜라요, 사이다요, 하고 소리치며 마치적진을 향해 서서히 쳐들어가듯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영락없이 한바탕 쑤시고 박치고 밀리었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홍익회 판매원이 운경이 곁을 떠나고 있었다.
아이를 낳는게 꼭 그렇다지.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만큼 고통이 번거롭고 게다가 이 아이를 그 조그만 곳으로 어떻게 낳지하는 공포가 죽는 것보다도 더 두려워져서 남편 말에, 친정엄마 팔에 살려달라는 듯이 매달리게 된다지. 그러다가 진통이 하도 심해 이젠 매달릴 함도, 호소할 힘도 없이 기진해져 버리면, 나도 모르겠다, 시간이 되면 나오겠지, 했다가 정작 아이가 나올 때가 되면 이것만 견디면 된다, 하는 희망이 솟는다지.
운경이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멀어져 가는 홍익회 판매원 머리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저 사내가 내 아이일 수는 없는데 꽤 내가 그런 비유를 들어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운경이는 혼자 까르르 웃고 싶었다.
그러나 저러나 이 사람은 어디를 갔담. 운경이는 아무리 눈을 비벼뜨고 찾아보아도 새벽부터 시골길을 동행한 선우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키가 큼직한걸 미루어선 얼핏 한 눈에 보일법도 한데.
언젠가 지독한 술김에 운경이를 안아보고 싶어하던 선우형이다. 그는 몸뚱이도 있고. 물론 남자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운경이는 안다. 그런데도 선우형과는 할 일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곁에 있으면 눈에 보이니까 선우형이고, 곁에 없으면 안 보이니자 아무 것도 아닌 선우형이다. 단지 오늘 동일한 목적을 갖고 하루를 함께 동행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없어졌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해진다.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운경이에게 쳐들어올 것 같고, 운경이는 여기서 참패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저 밑바닥으로 처박힐 것만 같아 두려움이 몰려온다.
따지고 보면 선우형도 이 열차 안의 낯선 사람들과 다름없이 각자가 그저 따로따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데, 다만 어쩌다 몇번 서로 스치고 지나면서 인사 한번하고, 이야기 한번하고, 통성명하고, 서투른 술 한잔 마시고 했다는 것으로 이렇게 의지되어질 까닭이 없는 일이다.
어딘가 있겠지. 화장실엘 갔던지, 탁한 공기가 싫어 밖으로 나갔던지 그랬겠지. 어쩌면 내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도망간 것일지도 모를 일이야 하루종일 선우형 재미있게. 해주지도 않고 혼자 바보같이 멍청한 눈으로 지냈으니 뭐 이따위 시시한 여자가 다 있어, 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
어떤 작가는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 떠나는 여행철에 어쩌다 아름다운 아가씨라도 옆자리에 같이 앉아 떠나게 된다면 마치 금상첨화와 같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선우형의 경우야 낮선 여자도 아니고 몇년씩 곁에서 눈여겨 분 여자를 곁에 하고 하루를 지내면서 마음이 들떠있지 않았을 리가 없는게 분명한데, 하루종일 운경이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도 한마디 걸지 않고 걷기만 했다.
운경이는 문득 자신의 피로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겠다는 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선우형에게 하루를 변명하는 기분으로라도 그 이유를 찾아내는게 옳겠다는 생각이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언제의 일이었을까. 운경이는 머릿속이 암담하기만 해서 도무지 어제라는 것, 그제라는 시간을 찾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석고 부서지듯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이 지친 몸, 곁에서 치근덕거리며 살을 맞대어 오는 타인들, 모습이 막힐 것 같은 열차안의 악취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건 핑계일거야.
그리고 나서 운경이는 차근차근히 지나쳐온 시간들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엔 안개가 껴 있고 가을 날씨가 별안간 추워졌었지. 그런데 나는 옷을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아랫목에 앉은 채로 벌떡 일어나 코트만 하나 들고 가방에 돈이 있겠거니, 여행하면서 돈과 칫솔만 있으면 되는 법이니까, 하면서 가방을 집어들고 뛰어나와 청량리역에서 선우형과 함께 부산가는 완행 첫차를 부랴부랴 올라탔지.
아침엔 내가 왜 잠을 자지 않고 앉은 채로 나왔지. 아 참, 나는 책을 읽고 있었어. 어제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마자 철학서점에서 새로 산「폴·틸리히」의 문고만 책을 읽다가 그만 그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려서 저녁을 먹든지 말든지, 밤이 새든지 말든지, 이불을 쿠션 삼아 엉치가 배기도록 아랫목에서 밤을 지샜지.
그래, 그러고 보니 이제야 모두 생각난다. 그제 밤엔 무어가 그리 바빴던지 두 주일이나 밀려 쌓였던 빨랫더미를 빨고 나서 밤3시가 되어서야 잠에 곯아 떨어졌었고, 그제는「에리히·프름」이란 사람과 사랑이야기 사회 이야기를 하다가 그날도 밤을 놓치고 새벽녘이 어스름해져서야 잠시 눈을 붙였었군.
그건 교섭(교섭)이었어
한 남자와 하나가 되어서 둘만의 깊은 세계속으로 밀집되어 들어가,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신인지 인간인지, 하물며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잊고 다만 한 사람과 만난다는 꼭 하나의 교접점(교접점)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실천한 시간이었어. 운경이는 어른이었던 어젯저녁까지도 교접이란 말초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육체적인 것 뿐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그 교접은 몸뚱이를 가진 남자가 꼭 곁에 있어주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제는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몸뚱이도 없었는데, 궂이 남자일 필요도 없었는데, 그가 어떤 얼굴의 어떤 사람인지도 무르는데 개미가 줄지어가 쭉 늘어선 활자가 보이는 그의 마음씨와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그와 하나가 되어 온데를 붕붕 떠다니면서 흔쾌한 합일(합일)의 유희를 즐겼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운경이는 이 일을 누구에겐가 막 자랑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희귀하고 근사한 경험을 뽐내면 어느 누구도 그것 정말 진귀하다,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아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소리쳤다던 옛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어떻게해서든지 자랑을 막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건 남자에게 건 내가 밤을 세워 한 인간과 하나가 되었던 것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담. 그건 마치 한 사내와 즐겁게 놀고 난 밀실의 모습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
실제로 어제 밤새는 운경이 가슴에 땀방울이 보송보송 솟았고, 책의 활자와 그것이 전하는 의미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마음이 너무 포만되면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고 하던대. 정말 운경이는 새벽녁부터 가슴이 아파와서 주먹으로 꽝꽝 가슴팍을 내리치면서 책을 마치 모두 읽었던 것이다. 데구루루.
콜라병, 소줏병이 구르면서 빈차는 어딘지 모를 어떤 역에 또 한번 정차했다. 그래서 운경이는「재빨리」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반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자리를 일어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실내로 가라는 식으로 옆 사람에게 기대어서 서로 잠을 자거나 멍청하니 눈동자의 초점을 잃고 잠이 오는 강아지처럼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아직도 여전했다.
이 땅덩어리 위에 사는 사람들은 워낙 좁은 바닥에서 살아온 때문인지 어디서나 자기의 설자리 혹은 앉을 자리를 확보하는데 혈안인게 분명하다고 운경이는 생각했다. 서로 보태 앉아도 될법한 자리를 잠도 자지 않으면서 감은 눈두덩 속으로 눈동자를 오락가락 굴리면서 잠자는 척하고는 두 사람 앉을 자리 혼자 늘어져 앉아 누워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여편네는 좌석 한 간을 모두 차지하고서는 자기 앉고 기저귀가방 놓고, 업었던 갓난이 억지로 앉히고 짐 보따리 놓고, 그리고 끝에는 맏이인지 시무룩해진 아이를 멀리 떼어놓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운경이는 이제 어찌된 세상노릇인가를 생각했다. 꽤 인간은 무턱대고 서로 밀어내려고 현안이고 밀어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하다가, 정신도 없는 동물처럼 뜯기고 피 흘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려왔다.
그래서 운경이는 참 잘 꺼냈어 라고 기분 좋아하던 일도 다 잊어버리게 되고 다시 이 인간들아, 하던 기억을 되찾게 되고 말았다.
별안간 심한 갈증이 몰려온다. 운경이의 사내스런 버릇 같아선, 만약 지금이 대낮이라면 1분간 정차하는 틈을 타서 열차에서 뛰어내려 분수처럼 생긴 수도꼭지에서 쫄쫄대고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고 신나게 뛰어들어올텐데, 지금은 밖이 너무 어두워서 수도꼭지는커녕 여기가 어디라는 팻말을 찾기도 힘든 일이다.
시계도 차지 않았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더가면 서울에 닿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운경이는 여기가 시청 앞이라면 수백개의 전광이 들었다는 큼직한 전광시계를 보면서 안심하고 시간을 맞춰서 집에 들어 갈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시계란 차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누가 시간을 물어오면 뭐 하러 무겁게 시계는 차고 다녀요, 길거리에 내 시계가 잔뜩 널렸는데, 하고 대답하곤 했는데 지금은 바로 그 시계가 필요함을 운경이는 절감한다.
아현동 고개를 내려오다 보면 어느 장의사집 옆에 행인들 보라고 유리창 쪽으로 큼직한 시계가 몇년전부터 걸려 있고, 시청앞, 신세계, 상업은행 앞을 지날 땐 아무때나 크리스머스를 그려보게 되는 시게가 있고. 정 시게가 없을 땐 파출소 문앞을 찾아가 잡혀온 잡범들 구경하듯 서서 살피면 하얀 벽에 시계 하나가 운경이 보라는 듯 걸려있게 마련이었다.
선우형이 운경이도 모를 어느 새에 사라졌듯이 시계 생각을 하다보니 열차는 어느새 또 덜커덩거리고 달리고 있었다. 운경이는 계속 갈증을 느꼈다. 열차가 달리니 그나마 수도꼭지 하나 없는 형편이 되었고, 홍익희 판매원은 운경이에게 애 낳는 것만 연상하게 해놓고 다신 다녀가질 않는다. 운경이는 문득 따끈한 코피가 한잔 마시고 싶어졌다.
「코피」한잔만 마셨으면.
조금은 시끌버끌해도 좋은 조그만 찻집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은자리에서 편안히 코피 한잔만 마셨으면.
운경이는 순간 서울바닥이 그리워져 왔다. 서울 동네에 동대문시장같이 시끄럽고, 쓰레기통처럼 지저분하다고 항상 불만이 많은 운경이었는데 어서 빨리 서울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엄습해 온다.
버스 한번 타려고 해도 마치 전쟁통 피난 가는 차를 탈취하듯 우루루 몰려 뛰어가서, 치고 받고 싸워서 올라타야 겨우 한숨 들리고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서울을 운경이는 싫어했다.
어릴적 자랐던 인천 집에서는 늦은 밤 자욱한 안개가 끼기라도 하면 으아 언니 동생 넷이서 손을 꼭 붙들고 뒷동네인 만국공원에 산책 나가 안개속에 어렴풋이 내려다보이는 인천항의 외항선 불빛이며, 달각거리는 자갈들 위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을 올려보기를 좋아했는데, 서울엔 물줄기라고 한강 하나밖엔 없어서 강물이 오염된 악취는 고사하고라도 겨울이면 서강 바람 신촌바람이나 만들어 4년간 학교 다니던 겨울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주 쓸데없는 것 같아 싫어했었다.
또 서울 토박이들은 어지나 이해타산이 빠르고 가증스런 토끼 같은지, 사람이 정을 주다보면 바보가 되어 있고, 정을 안 주다 보면 외톨이가 되어있게 만들어서 도대체 이 고장은 사람을 만들어내는지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가 없이 화가 나는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코피를, 따끈하고 달콤한 코피 한잔을 주는 서울이 그리워진다. 눈썹을 그린 다방레지가 있고 코피 가는 믹서가 있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는 찻집이 그리워진다.
시계가 마련되어 있는 서울에는 또 코피도 마련되어 있다.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모두가 집을 텅텅 비우고 밖에만 나와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또 어느 집을 들어가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잔뜩 살아가고 있다. 시계는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코피는 들어앉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되어있는 서울바닥.
시골은 껍질뿐이었어.
시골을 찾고 싶다는 마음의 갈증이 산과 농촌의 초록색 신호에 놓아, 무조건 그 곳에만 가면 바라던 모두가 충족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졌던 껍데기였는걸. 저녁 여섯시만 되면 서울 가는 차가 끊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이 곳에는 벌써 밤이 찾아와 사람들은 이때부터 아침까지 동면(동면)하는 개구리처럼 방안에 칩거하여 아침까지 잠을 자는게 보통인걸. 그래서 운경이는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불편함의 악취라고 생각했다.
서울엔 매연과 먼지만이 가득해서 쓰레기통에 불과하다고 어겼지만, 이젠 시골이 악취가 가득 찬 시간의 쓰레기통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밤이 새도록 불이 켜지고 자동차들이 움직여 그 속에서 사람들은 들끓며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는 걸. 운경이는 오늘에야 덜컹이는 기찻간에서 생각해 내는 것이다.
PPM 0·002니 뭐니 합성세제가 인체에 어떻구, 청계천 하수구가 위험하다는 등, 고게 어떻다는거야. 그게 보도가 내 엄마가 딸래하고 형제들이 올라타고 금쪽같은 친구들이 쓰고 버린 것들인데 그게 어떻단 말이야. 살아가는 흔적인걸. 그걸 없애면 어떻게 된다는 거야.
시골이라는 전원생활 속에서 살면 조용한 시간이 풍부하므로 밤이 깊도록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것 같지만 그 껍데기 속은 텅 비어있는 걸. 책을 사려도 책방하나 없는 곳이야. 저녁만 먹고 나면 잠들 준비나 서두르고, 초저녁인 아홉시면 어느새 마을의 불들이 거의 꺼져 모두가 조용히 잠만 즐기니, 그 사람들이 모처럼 차만 타면 이렇게 꼬박꼬박 이야기 소재가 없으니 모여 앉아 남의 험담이나 털어놓고, 어른들은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순진한 어린애들 불편하게 전통과 규범이라는 것만 만들고, 아낙들은 아침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리고 점심 먹고 설겆이 하고 저녁준비하고 저녁 먹고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가 잠잘 궁리나 또 하고 그러니까 시골에선 시계도 볼 필요가 없고 코피 마실 여유는 더욱 없지. 그러다 보니 열차 안에 수도꼭지하나 없는 것이 기차가 매일 달리기나 하고 그밖의 다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까맑인 것만 같아 운경이는 이거 너무 심한 괴변으로 처박히고 있잖아, 하게 되어 혼자 심심치않게 웃었다.
열차가 사막일리는 없지만, 물이 한 모금도 나오지는 바닥을 가졌으니 사막인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더욱 코피만 마시고 싶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빨리 가고 살기까지 하니 그건 운경에게 견딜 수 없는 심한 갈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바람을 죄면 좀 나을거야 .
그래서 운경이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문께로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중에 어떤 청년 한명이 짓궂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꼿꼿이 선채로 운경이 얼굴만 빤히 쳐다보면서 싱글싱글 웃으며 별안간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일이 벌어져서 운경이가 몸의 군형을 잡으려고 의자에 손을 급히 갖다대다가 그만 그 청년의 손을 꽉 붙들어버려 하마터면 오해를 살 뻔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사내는 이 인간아. 하는 밀도 할줄 모르는군. 꽉 닫힌 열차의 문을 힘껏 당기는 순간 찬바람이 한 뭉텅이 세차게 운경이의 몸을 때렸다. 소름이 돋으면서 운경이는 이상한 현깃증 같은 것을 느꼈다. 열차안과는 너무 심한 차이가 나는 공기여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이 순간만은 견디기 힘들만큼 역겨운 것이다.
운경이는 묵중한 문을 다시 힘껏 닫았다. 열차의 연결 부분에는 냄새나는 화장실이 있게 마련인데 걱정한 바와는 달리 앞 칸의 끝이나 이쪽 칸의 앞이나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한 일이다. 운경이는 이제 조그만 공간 한 구텅이에 가 서서 혼자 창 밖을 내다 볼 양으로 그곳에 있어도 좋은지 어떤지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 선우헝!
깨진 차창앞에 어두운 모습으로 기대어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던 선우형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무어예요, 혼자 여기 계신 줄은 몰랐잖아요.
선우형은 놀라지도 않고 아무말 없이 씩 웃으면서 자리를 조금 비켜서더니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큼직한 부대를 가리키며 여기에 걸터앉지, 피곤해 보이던데, 하고 말했다.
푹석한 고추 부대. 그것은 아마도 김장철을 맞아 시내로 팔러가는 큰 보따리겠지. 아니면 시골 사시는 친정어머니가 한해 농사지은 것을 정성 들여 담아 딸내미에게 가져다주려고 이이 차에 실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추측을 하니 그 부대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위져서 어쩌나, 하고 운경이는 망설였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엄마가 마루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가을 햇살을 받으며 싹둑싹둑 가위질하시던 고추는 어느 해나 한결같이 납작하게 눌러진 것이 분명했으므로 운경이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는 자신이 마치「스칼랫·오하라」가 된 기분으로 이 촉감이 새털 침대 속으로 쑤시고 들어가는 꼭 그런걸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고추부대 위에 털썩 내려앉았다.
하늘이 깊어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푸른빛이 남아돈다고 억지를 쓰면 그럴 법도 하다고 대답할 검푸른 하늘엔 알상한 달이 뚜렷한 선을 그리며 떠있다.
저것이 초승달이던가, 그믐달이던가.
운경이는 얼핏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긴 별자리를 배우던 국민학교 4학년 매부터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별하려면 언제나 머릿속이 오락가작 해져서, 재수가 좋으면 맞은 답을 쓰고 재수가 나쁘면 틀린답을 쓰는게 화가 나서 나중엔 머리를 짜내어 가지고 왼편으로 둥근달은 보통 그리기 쉬운 것이라서 부르기 쉬운 초승달이라고 말하기가 쉬우니까 나는 거꾸로 그걸 그믐달이라고 때를 쓰면 그게 맞는 답이야, 라고 생각하기로 작정한 뒤로 그런식으로 답을 쓴 것은 항상 동그라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오른쪽으로 등근걸보니 그믐달인게로군.
달은 기찻길이 꼬불꾜불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저 오른쪽 창으로 보이다가 왼쪽 창으로 보이고 그런다.
훤하니 뚫린 공간으로 찬 공기가 맘껏 몰아쳐 운경이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옴츠러들었다. 「의사 지바고」영화에서 지바고의 가족들이 시커먼 기차를 타고 휘몰아치는 눈발을 뚫고 피난 가던 생각이 난다. 지바고가 얼굴 면적 만한 쇠창문을 삐끔히 열었을 때 들이치던 찬바람. 그러나 그 구멍을 통해 나다나던 검푸른 하늘과 밝은 달, 또 그 밑에 펼쳐지던 눈 덮인 마을의 정경, 그런가하면 사람들이 인을 지푸라기에 섞어 달리는 열차 밖으로 쏟아붓던 여러 장면 등.
운경이는 이쯤의 추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생각할 때 귀향길의 이 정드는 어느 고통에도 비길 바가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추위 정도는 잊을 수가 있다. 자극되어지는 신경을 몸으로부터 정신으로 옮기고 이 몸은 마치 내 몸이 아닌 무감각한 옷이라든가 혹은 저기 굴러다니는 나무 조각이라고 여기면 어떤 추의도 고통도 모두 잊을 수가 있다. 그래서 운경이는 경신을 가다듬고 추위 잊을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그렀다. 밤새 아무 것도 먹지를 않았으므로 배가 말도 못하게 고팠으나 공복의 깨끗한 촉감이 어찌나 좋던지 식도와 위가 허기에 지쳐 목줄을 계속 당기는 것을 잊으려고 이것온 내 위가 아닐지도 몰라, 내 몸이 아닐지도 몰라 라고 속임수를 썼고 그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 맑은 정신을 두시간여 동안 맘껏 즐겼었다.
모두들 즐기자 추위고 배고픔도 그리고 고통도. 그래서 운경이는 모든 걸 잊고 즐거움 속으로만 밀집되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문등둥를 만난다는 생각을 했을땐 도무지 긴장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들의 모습을 과연 두 눈으로 볼건지, 보자마자 까무라칠 것은 아닌지, 그들을 보고 몰아와 며칠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 건 아닌지, 어쩌면 나는 울면서 돌아오고 말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운경이는 오늘 울어버리지도 않고 아주 침착하게 다녀왔다. 두 눈으로 똑똑히 그들을 보았고 끝내 까무라치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그들과 마주앉아 식사도 맛있게 들었다.
잘려진 손가락, 꼬여져서 절룩이는 다리, 눈두덩이 없이 흰 부분이 완전히 드러난 눈동자, 푹 패어진 코, 오므라든 귀, 닫혀지지 않는 입술과 하얗게 드러난 이빨.
운경이는 그런 모습을 사진에서나 영화에서는 간혹 보았다. 그러나 그릴 때마다 눈을 감아 버리거나 사진을 덮어 버리곤 했는데 오늘은 두 눈으로 똑똑히 그들을 보고 살폈다.
긴장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그들이 창경원의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약 두주일 전에 선우형과 오늘 같이 떠나기로 약속했을 땐 마음 밑바닥에 호기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예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고 싶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구경거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결국엔 들었던거예요.
며칠전 운경이가 시내로 바람쐬러 나와서 누굴 만날까 하다가 문득 선우형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던 날, 둘이는 오랜만에 됫술 파는 집에 들어가 모처럼 다정다감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았었다.
고향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아무리 고생하며 자란 곳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안의 거추장스런 기억은 하나도없이 사라져 버리고 정겨운 그리움만 남아 느닷없이 찾아 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한다. 운경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맛동안 조그만 부속품이 되어 일하던 고 침묵의 무덤속 신문사도 요즘은 자꾸 그리워져서 가끔씩 들여다보지 않으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 날도 운경이를 못살게 굴던 선우형이 보고싶고 신문사 냄새도 맡고 싶다는 그리움으로 미운 사람 보러가자 하고 선우형에게 전화를 했었다.
헐벗고 굶주린 자들,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을 구경거리로 여기는 것은 죄악이 아니겠어요. 그저 감각적인 동정만으로 혓바닥이나 쯧쯧 차고 돈 몇푼 던져주고 돌아오는 것이 원숭이 재롱을 보고 깔깔대고 웃다가 과자 몇 조각 던져주고 돌아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그것이 하나는 어두움이고 하나는 밝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요.
그들을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긴장을 풀 수 있있고, 그저 며칠 못본 형제를 보러가는 기분이 뇔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에 관한 기대는 며칠동안 무의식 속으로 돌아가 버리고 아무호기심이나 설렘 없이 하루를 지내고 을 수 있었던 거예요.
여기 앉지 라는 말을 한 뒤론 계속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 한마디의 말도 않던 선우형이 이 말을 듣고 나서 씩 웃는 모습을 보니 운경이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그렇게 시시했었군, 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운경이는 무언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제는 잠을 한잠도 못 잤어요.
선우형이 다 피운 담배꽁초를 깨어진 창 밖으로 획 던졌다. 꺼지지 않은 담뱃불이 어둠속에 노란 불을 밝히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운경이는 차창 밖으로 목을 밀었다. 덜컥 덜컥 덜컥, 열차는 자갈길을 계속 달리고 담뱃불은 꺼졌는지 안 보이게 된건지 반딧불같은 노란 불빛은 사라지고 말았다.
밤새 무얼 했길래.
운경이는 이젠 설명해야겠다고 신이 나서 입을 열었으나 무얼했어요 하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한 여자가 밤을 지샌 이야기를 어찌 타인, 더구나 남자에게 할 수가 있담.
선우형은 또 씩 웃기만 한다.
아차, 그건 오해일 수가 있겠군. 무얼했다니, 그렇게 애매한 대답이 어디 있담.
아침부터 잠이 몰려드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지네는 것을 하루종일 지켜보았던 선우형이 그 이유를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 재미있었나.
네, 재미있었어요, 무척 또 웃네.
책을 읽었어요 책속에 한번 몰입되기 시작하면 그 맛이 기가 막힌걸요. 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더구나 그런 작품속에 나타나 보이는 작가를 동감할 수 있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속에 파묻히고 마는 거예요.
아직도 씩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고 고추부대 위에 앉아있는 운경이를 내려다보는 선우형을 표정에서는 운경이는 이 세상에 책 안 읽어 본 놈 어땠누. 하는 말을 듣는 것 같아 공연히 창피스러워졌다.
그러나 마치…
그러나 운경이는 입을 다물고 맡았다.
그건 역시 교접(교접)의 밀실(밀실)이다. 이러면서 우린 점점 막혀 가는 거야 라고 운경이는 생각한다. 홀랑 벗어도 안 벗어도 상관이 없는 일을 벗으면 안 된다고만 생각하니까 점점 막혀가기만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언제부터 거기 모여서 사는 거예요
일년이 조금 넘었지.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문둥이 촌에서 살다가 차별 대우가 심해서 천주교 신자들만 따로 나와 그 마을에 정착한 거지.
하지만 아까는 무슨 말을 하다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이 마을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 그것도 모순이 되는군.
시어머니가 며느리 미워하니까 이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어 다시 며느리 미워하는 것과 무엇이 달라요. 왜들 그렇게 살아요.
곤란한 질문인데.
똑같은 여자끼리 시어머니다 며느리다 하고 미워하고, 똑같은 문둥이끼리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미워하고, 똑같은 인간끼리 문둥이다 성한 사람이다 하고 미워하잖아요.
그래, 그렇다. 사람들은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것이 마치 생의 목적인양 미워한다. 가게 주인이 깜짝 놀랐다고 나를 미워하고. 도시사람이 불편하다고 시골을 미워하고, 혼자만 편하게 앉아서 간다고 서있는 사람이 앉은 사람을 미워하고, 신문 장수가 거짓말장이라고 속은 사람이 미워한다.
예수님의 아들들이 부처님의 중생을 미워하고, 옷을 입은 자가 옷을 벗은 자를 미워한다. 운경이는 아까 선우형이 문둥이들을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청했을 때, 문둥이들이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마주 내밀던 주먹손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가 반가운 표시일뿐인데 그것이 손가락 하나없이 뭉그러진 것이라고 해서 주춤했던 운경이는 편견덩이였다.
오히려 운경이가 미워하던 신우형이 옳았다. 술을 마시며 문둥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선우형은 그들을 남몰래 찾아가 도운 것이 벌써 일년이 넘었다는 말을 했었다. 수해(수해)가 나면 흙집이 모두 떠내려가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그들은 쉴곳마저 잃어 한여름 다시 흙벽돌을 직을 때 땀을 흘리며 그들의 주멱 손을 돕던 선우형인걸 운경이는 비로소 알았다.
그 자리에서 운경이는 그저 좋은 일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언제 한번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했고 선우형은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하여 한가한 날을 잡아 그 동네에 찾아가 보기로 약속했었다. 그래도 그 날은 문둥이는 문둥이고 나는 나지, 하고 생각한 운경이는 선우형을 계속해서 미워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선우형이 밉다는걸 잊는다. 선우형이 운경이를 못살게 일만 시킨다는 편견으로 그의 모든 것까지 미워했던 것이다. 모두가 껍질만 보고 사는거야. 문둥이의 껍질이 흉하고 평범하지 못하다고 해서 비웃는 거야. 사람들 눈이 멀어 마음은 보지 못하고 얼굴만 보는 거야.
운경이는 그제서야 우리 모두가 닮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도 남자도, 아이도 어른도, 갑부도 거지도, 스승도 제자도, 그리고 문둥이도, 운경이도 선우형도 틸리히도 하나같이 인간이라는 점이 닮았다고 안다.
서울에 다 닿아 가는 모양이야. 우리 잠시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녹이고 내리자.
그래요
밤을 밝히는 전깃불의 숫자가 점점 많아진다고 기분 좋아하면서 운경이는 선우형이 밀어놓은 묵중한 문을 통해서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비린내! 차
생선 썩는 비린내와는 하나도 닮은 점이 없는데 운경이는 비린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비린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산다. 살기 때문에 죽고, 죽기 때문에 비린내가 난다.
냄새가 대단하군
하지만 우리 하지만 우리 이 냄새도 한번 즐겨 보아요. 아침에 허기를 즐겼듯이 깨진 차창 앞에서 추위를 즐겼듯이 이 악취를 즐겨요.
그리고는 선우형도 운경이도 씩 웃는다.
아직도 사람들은 여전히 잠만 늘어져 자고, 열차가 점점 밝아 지난 역에 정거할 때마다 콜라병 소줏병들이 데구루루 굴러다닌다.
점점 차를 내리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가고, 운경이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밀치고 바쳐졌지만, 이것은 내 몸뚱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건 불쾌한 것도 유쾌한 것도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었다.
우리 청량리에 내려서 따뜻한 코피 한잔 마시고 헤어져요.
좋지.
11시 반이 되어서야 열차는 청량리에 닿았다. 선우형과 함께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개찰구로 나오는데「청량리-부산진」이란 표지판이 눈에 뜨인다. 우리가 아침에 탔던 열차야.
선우형이 말을 해서야 운경이는 그것이 붐비고 냄새나는 또 하나의 부산행 3등 열차라는걸 알았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위해 급히 뛰어가기도 하고 열차안에선 편안히 앉아 벌써부터 주간잡지 꺼내 여행기 부분을 내며 들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짐들을 나르고 내리고, 잘 있으라고 인사를 하고 잘 가라고 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그들은 또 엎치고 뒤치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겠지. 운경이는 왠지 그들에게 이 인간들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비린내 속에서 들끓을 인간들아, 하고. 그러나 그건 저주도 아니고 비웃음도 아닌, 그들도 그 안에서 비린내를 즐기기를 바라는 염원이다.
오늘은 택시를 타고 편안히 집에 도착하겠군. 시간은 없지만 기분좋게 코피한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 삼일을 못 잔 잠 내쳐 자야지.
통금이 가까운 시간의 청량리역 앞 로터리가 아직도 인간들로 붐비고 전등불, 헤들라이트로 밝게 빛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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