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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역사상 최고 첩보원, 조르게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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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

20세기 최고 스파이 -. 그의 기념비는 강렬하다. 그의 매서운 눈매를 형상화했다. 그 조각상이 나를 훔쳐본다. 나는 그 시선에 갇힌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캅카스 지역 카스피 해 항구다. 옛 소련 첩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1895~1944·사진)의 출생지다. 그곳의 조르게 기념비(사진 아래)는 첩보전 승리의 전설을 담았다. 그 무대는 일본. 2차 세계대전 때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였다. 동쪽 시베리아에 소련군 대부대가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그 부대를 빼내지 못했다. 러·일 전쟁(1904년) 패배 악몽 때문이다. 접경에 일본 관동군이 주둔했다.

 그 무렵 일본은 고심했다. 북방(소련)이냐, 남방이냐. 그해 9월 6일 일왕 주재 어전회의에서 정해졌다. 선택은 남방(인도차이나) 침공. 조르게의 정보망에 포착됐다. 그는 10월 4일 1급 기밀을 크렘린에 보냈다.

 스탈린 반응은 신속했다. 시베리아 40개 사단을 이동시켰다.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했다. 독일군 공세는 저지됐다.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formidable) 스파이”(이언 플레밍, 007 시리즈 저자)로 기록된다. 역사 흐름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정보전의 위력이다.

 조르게 아버지는 독일인. 바쿠의 유전 기술자였다. 그 시절 그곳은 러시아 땅이었다. 어머니는 러시아인. 조르게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독일군)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는 조국을 배신한다. 소련을 위해 충성한다.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 그는 도쿄의 첩보책임자로 발탁된다. 독일 신문 특파원으로 위장했다. 언론 공간에서 조르게 재능은 발휘됐다.

 기밀 타전 보름 후. 조르게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3년 뒤 처형된다. 무덤은 도쿄에 있다. 러시아의 2차 대전 승전기념일은 5월 9일. 지난해 그날 아파나시예프 주일 러시아 대사는 무덤에 헌화했다. 조국전쟁 영웅으로 추모했다. 그 장면은 국가의 기억과 예우를 상징한다.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들은 다르다. 첩보세계 종사자의 헌신과 열정을 잊지 않는다.

 조르게 기념비는 1981년에 세워졌다. 소련 연방 소속 시절이다. 러시아 조각가 블라디미르 치갈의 작품이다. 눈매만 압축해 묘사했다. 그 눈빛은 기밀 탐지의 본능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익명과 프로정신이다. 그것은 첩보 세계의 미학이다.

 국정원장 남재준은 15일 사과했다. ‘유우성 사건’ 증거조작 때문이다. 유우성의 정체는 모호하다. 출신은 중국인 화교. 탈북 정착금도 탔다. 그는 3류 간첩 혐의자다. 그 사건으로 국정원은 추락했다. 수습 과정도 아마추어였다. 블랙 요원 신상이 드러났다. 인적 첩보망(휴민트)은 망가졌다.

 남재준은 국정원 쇄신을 다짐한다. 국정원 탈선에 대한 여론 질타는 뜨겁다. 그 소리 모두 현장 정보원들에겐 공허하다. 그들은 답답해 한다. 대공 수사의 수단과 도구가 미흡해서다.

 선진 정보 국가는 다르다. 미국은 ‘애국법’이 있다. 테러 의심자는 별도 취급된다. 전화, e메일이 감청된다. 영장 없이 체포, 기소한다. 애국법은 시민 안전을 우선한다. 테러혐의자 인권은 나중이다. 한국에선 간첩 잡기가 힘들다. 간첩의 휴대전화도 감청할 수 없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잠잔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국정원 논쟁 때 등장한다. 개혁의 롤 모델이다. 하지만 모사드 첩보 활동은 곡예다. 준법과 탈법 사이 담장 위를 걷는다. 그 속에 납치, 암살도 있다. 실패도 있다. 모사드의 성공과 실패 드라마는 비공개·비노출이다.

 올해 퓰리처상은 에드워드 스노든에 맞춰졌다. 그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이었다. 지난해 스노든의 폭로는 세계를 흔들었다. NSA의 무차별 불법감청이 드러났다. 미국 정부의 대처는 은밀했다. 정치논쟁에서 분리시켰다. 사건 내막, 문책과 수습 내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영국 MI6 책임자 존 소어스는 “정보기관 생명은 비밀”이라고 했다. 노출과 공개는 국가 정보역량을 떨어뜨린다.

 야당과 민변은 국정원 공략에 열중한다. 그들은 정보기관을 발가벗기려 한다. 검찰은 국정원을 압수 수색했다. 그 사실을 공개한다. 전직 국정원장 김성호는 검찰 행태를 개탄한다. “국익에 대한 사법적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는 검사 출신이다.

 우리 사회는 정보의 소중함에 둔감하다. 정보 마인드는 허술하다. 한국의 정보활동 환경은 척박하다. 독자적 정보 수집 전통도 빈약하다. 자력 정보는 자주국가의 핵심이다. 국정원 혁신의 출발은 환경 적응부터다. 조직 행태와 사고방식을 수술해야 한다. 익명의 차가운 정열로 재구성해야 한다. 대공 수사 강화의 수단도 마련해줘야 한다. 그것들이 정보기관 비정상의 정상화다. 정상화의 큰 그림이 절실하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