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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젊은 배 대리의 슬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0호 30면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는 가엾은 배 대리의 이야기와 관련해 제가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을 정성껏 한데 묶어 여기 여러분 앞에 내어 놓습니다.

2004년 6월 16일. 김 과장님, 감사합니다.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다니. 선물해주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잘 읽겠습니다. 주는 사람의 허영심이 우리를 욕보이는 눈부신 선물보다 이런 작은 호의가 천 배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요즈음 제 영혼은 감미로운 봄날 아침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명랑함에 휩싸여 있습니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해외영업부 노 대리 말입니다. 출근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배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그녀의 얼굴엔 순진무구한 사랑의 기쁨이 입술을 맴돌며 황홀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퇴근하면서 소주 한잔하실래요?

7월 8일. 요즘 제가 과장님께 하는 말이 새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과장님을 두고 입이 싼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오전에 확대 영업회의가 있었잖아요. 노 대리가 그렇게 프레젠테이션을 잘할 줄 몰랐습니다. 과장님도 보셨어야 하는데.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성격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그 얼굴에서 정신의 광채와 매력이 새롭게 발산되었습니다. 만일 천사가 있다면 노 대리와 같은 모습일 겁니다. 어디서든 제 상상력은 오직 그녀의 모습만을 떠올리고, 제 주변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그녀와의 관계에서만 보인답니다. 과장님, 저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발표할 때 그녀의 눈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옮아갔어요. 그런데 오로지 그 눈만을 애타게 찾는 저! 저! 저! 저한테만은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오늘 맥주 사주세요.

7월 16일. 과장님, 어제는 영업부 회식이 있었어요. 저도 참석했어요. 어쩌다 보니 저는 노 대리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아아, 우연히 제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고 우리의 발이 식탁 밑에서 맞부딪치면, 그 충격이 제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습니다. 저는 불에 덴 듯 움찔하고, 그러면 비밀스러운 힘이 다시 저를 앞으로 잡아끕니다. 저는 정신이 온통 어지럽습니다. 오! 그녀의 순진무구함, 그녀의 숨김없는 영혼은 그런 작은 친밀함이 저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느끼지 못한답니다. 과장님, 금요일인데 한잔해야죠?

9월 10일. 과장님, 드디어 고백을 했어요. 도저히 얼굴을 보고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메일을 보냈습니다. 노 대리님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회사에 당신을 정말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말이죠. 메일을 보내고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가로이 빈둥거리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무슨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조금 전 노 대리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 좋아한다는 남자, 김 과장님이죠? 배 대리님과 가장 친한 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분 결혼하지 않았나요?” 과장님,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언제까지나 이대로,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요. 우리 세 사람 가운데 하나는 떠나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꼭 술 사주세요.

** 컬러 부분은 모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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