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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서방 보라는 듯 하이킥 … 미 “동유럽에 미군 배치” 응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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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호 03면

11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의 검찰청을 점거했던 마스크 차림의 친러시아 시위대가 12일 쇠 곤봉을 든 채 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청사를 경찰로 에워쌌을 뿐 시위대 중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다. [도네츠크 AP=뉴시스]

우크라이나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손 안의 공깃돌’ 신세가 되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들었다 놨다, 울렸다 을렀다를 반복하는 데도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유럽연합(EU) 지도자들은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성명이나 발표하며 말싸움으로 대응하는 처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장기전 양상을 띠면서 푸틴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거친 남자 푸틴의 우크라이나 ‘군기 잡기’

대표적인 전쟁터가 에너지 분야다. 푸틴은 서슴없이 천연가스를 택했다. 이는 최대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이 들고 있는 최고의 압박 카드다. 푸틴은 지난 10일 “우크라이나의 늘어나는 가스 채무가 유럽에 대한 공급을 위협할 수 있다”고 포문을 열면서 이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이날 “푸틴 대통령이 유럽 정상들에게 불어나는 우크라이나 채무와 관련해 극도의 우려를 밝혔다”고 전했다. 말이 우려이지 실제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스관을 잠그고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조이겠다’는 위협이나 다름없다.

AF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미 지난달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 가스 ‘외상값’ 22억 달러를 받아야겠다고 강조해 왔다. 지난 5일엔 가스 공급을 맡고 있는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의 알렉세이 밀레르 사장이 “(지난 4년간) 우크라이나에 할인해준 가스 대금 114억 달러도 받겠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 자국 흑해함대 사령부를 두는 대가로 할인 혜택을 줘왔다. 그러다 크림을 합병하면서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 우크라이나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연합(EU)에 가입해 ‘서방의 러시아 포위망’에 가담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이 진짜 이유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정난으로 국가부도 직전 상황인 우크라이나의 과도정부는 이런 돈을 지급할 여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미 지난 1일과 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값을 연이어 올려 최종적으로 70%나 인상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에너지 보조를 중단하면서 이미 5월부터 가스값을 50% 가까이 올려야 할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이제 ‘에너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할 딱한 처지다.

푸틴은 9일엔 아예 못을 박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선불 조건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다. 가스 공급과 채무 문제를 앞세워 우크라이나에 대한 고삐를 단단히 죄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동부에 자치공화국을 세우고 우크라이나를 느슨한 연방 체제로 만드는 한편,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동등한 공용어로 쓰게 해 위성국가로 삼겠다는 게 푸틴의 목표로 분석된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를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이어진 가스관 밸브를 잠그는 일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가스관의 상당수가 지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BBC방송에 따르면 EU는 가스의 3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며 이 가운데 50% 정도는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가스관을 통해 공급받는다. 벨라루스를 지나는 ‘노던스트림’과 폴란드를 거치는 ‘야말’의 두 가지 경로가 있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가스 공급을 끊으면 서방에 대한 공급도 동시에 중단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서방에 대한 압박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러시아에도 자충수가 될 위험이 있다. 서방과 우크라이나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러시아의 노림수인데 가스관을 잠그면 그 반대로 양자가 운명공동체로서 더욱 끈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방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에 따르면 러시아 가스의 최대 고객은 독일과 이탈리아다. 러시아 에너지의 전략적 의미를 간파한 독일은 몇 년 전부터 석탄발전소를 증설하고 해안 풍력발전소를 비롯한 재생 가능 에너지 설비를 늘리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다. 그 결과 영국과 독일은 2012년 우크라이나를 통해 210억㎥를 들여오던 러시아산 가스 수입량을 2013년 117억1000만㎥로 줄일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2012년 150억8000만㎥이던 도입 물량이 2013년 253억3000만㎥로 크게 늘었다. EU 회원국 간에도 상황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분열이 생길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수치다.

또 다른 전쟁은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고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지난 6일 벌어졌다. 친러시아 시위대가 이날 도네츠크·루한스크·하리코프 등 3개 주요 공업도시의 시청사에 난입해 러시아 국기를 내걸고 분리독립과 러시아로의 합병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신속히 특수부대를 파견해 진압했다. CNN에 따르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시청사 점거는 러시아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했으나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내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압박했다. 러시아는 실제로 4만 명의 군대를 우크라이나 국경 부근에 계속 주둔시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동유럽의 불안과 동요다. 특히 1940~91년 소련에 점령됐으나 지금은 독립국가로서 EU와 나토 회원국이 된 발트 연안 3개국이 가장 고민이다. BBC에 따르면 인구 130만 에스토니아의 25%, 200만 라트비아의 27%, 300만 리투아니아의 6%가 각각 러시아계 주민이다. 러시아계는 대부분 국적과는 무관하게 거주국이 아니라 러시아를 조국으로 여기는 것은 불론 ‘강한 러시아’를 외치는 푸틴을 적극 지지한다. ‘국민 속의 또 다른 국민’이고 러시아 민족주의가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상황에선 ‘내부의 적’으로도 볼 수 있다. 게다가 푸틴은 “현지 러시아인의 안전”을 거론하며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이에 따라 EU와 나토 동진의 상징인 이 세 나라는 푸틴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세 나라 모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와 접경) 있어 러시아는 이들을 ‘목앞의 비수’로 여겨왔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국영 RTR방송의 자국 내 송출을 중단하는 등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정치 선전전을 경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폴란드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아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러자 미국이 급히 전투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상징적인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벌어진 동서 갈등과 위기감이 그야말로 동유럽 곳곳으로 확대되는 상황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EU 28개 회원국은 필립 브리드러브 나토 사령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오는 15일까지 동유럽 회원국들을 안심시킬 방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브리드러브 사령관은 9일 “(우크라이나 사태로 위기를 느끼는) 동유럽 동맹국에 미군을 배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불안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신냉전’을 공고화하고 ‘미국과 서방에 맞서는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푸틴의 위상이 높아질 수도 있다. 오바마와 메르켈의 리더십이 어떻게 푸틴의 야심을 잠재울 수 있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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