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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우리 땅 우리 나무<12> 자두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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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① 창경궁 옥천교 옆에 자라는 자두나무. ⓢ 익어가고 있는 자두. ③ 대한제국 유물인 자두꽃 무늬 은잔.

이(李)씨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오얏 리’라고 했다. 자두의 옛 이름이 오얏이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서울 도봉구 번동의 유래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말 풍수도참설이 유행할 때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고려 조정은 마침 이 일대에 자두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고 여겨 베어 없애버리는 벌리사(伐李使)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벌리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한자 이름으로 바꿀 때 번동(樊洞)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두나무를 조선왕실에서 특별히 대접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말기인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실을 상징하는 무늬에 자두꽃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황실 의복과 용품, 조명기구를 비롯한 각종 기물에 두루 새겨졌다. 최초로 발행된 우표도 자두꽃과 태극무늬가 들어 있어 이화(李花)우표라고 한다.

 건축물로는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와 덕수궁 석조전의 삼각형 박공에서 자두꽃 무늬를 만날 수 있다. 창경궁 정문을 들어서면 옥천교(玉泉橋) 양 옆으로 세 그루의 자두나무가 자란다. 봄날 잎보다 먼저 무리 지어 피는 새하얀 꽃이 이씨의 궁궐임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자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백제 온조왕 3년(15)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적어도 2000년 전부터 과일나무이면서 꽃나무로 심고 가꾸어온 것이다. 한글로 쓴 옛 문헌에는 자두의 원래 이름이 ‘오얏’이다. 한자 문헌 일부에서만 ‘자도(紫桃)’란 이름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개화기 학자들이 나무 이름을 새로 붙일 때, 익숙한 한글 이름 오얏 대신에 보랏빛이 강하고 복숭아를 닮았다는 뜻의 자도를 선택했다. 광복 후 한글맞춤법에 따라 다시 변해 자도가 아니라 자두가 정식 이름이 됐다. 옛사람들이 부르던 오얏나무가 훨씬 정겹다는 의견도 많다.

 자두나무는 복숭아와 짝을 이루어 도리(桃李)라고 쓴 경우가 많았다. 중국이나 우리의 시가(詩歌)에서 도리를 노래한 구절은 무수하다.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라고 하면 믿을 만한 자기 사람으로 세상이 가득 찼다는 뜻으로 실세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흔히 쓰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자두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자문에는 과진이내(果珍李奈)라 하여 과일 중 보배는 자두와 능금이라 했다. 맛이 좋다는 뜻이겠으나, 오늘날 우리 미각으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자두는 개량종으로 굉장히 맛이 좋아졌음에도 자두라고 하면 신맛을 상상해 입안에 군침부터 먼저 돈다.

 옛사람들은 좀 더 많은 과일이 달리게 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조선후기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정월 보름날 자두나무 등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굵은 돌을 끼워 넣는 나무시집보내기(嫁樹)를 했다. 이렇게 하면 과일이 많이 달린다. 잎에서 만들어진 광합성 양분이 뿌리나 줄기의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를 압박해 양분이 과일에 많이 가도록 유도하는 과학적인 조치였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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