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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원대? 200위안에 팔렸을 때만큼 기쁘진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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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샤오강(56)의 ‘혈연:대가족 No.3’(179×229㎝). 1995년작으로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됐던 이 그림이 지난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9420만 홍콩달러(약 128억원)에 팔렸다. 장샤오강의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오래된 가족 사진을 토대로 한 ‘중국인의 집단 초상화’다. [사진 소더비(Sotheby’s)], [베이징=권근영 기자]
중국 베이징 작업실의 장샤오강. [사진 소더비(Sotheby’s)], [베이징=권근영 기자]

낮엔 중국 쿤밍(昆明)의 가무단에서 무대막을 그렸다. 화가도 노동자도 아닌 ‘미공(美工)’이었다.

하고 싶은 그림은 밤잠을 줄여가며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돈이 되고 밥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장샤오강(張曉剛 ·56)이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본 것은 1988년, 서른 살 때였다. 고객은 이웃의 일본인 화가, 한 점에 200위안(3만4000원)씩 쳐서 두 점을 샀다.

 지난달 베이징의 예술촌 이하오디(一號地) 내 대형 작업실, 장샤오강은 거기 앉아 26년 전을 돌아봤다. “내 우상 빈센트 반 고흐처럼, 한평생 외로이 그림만 그리다 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던 무명 시절이었다”라고. 그는 “처음 판 그림 값이 내게 얼마나 큰 돈이었는가 하면, 그 때 통장에 남은 전재산이 200위안이었다. 그림 값을 보탠 600위안으로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며 “시간이 흘러흘러 내 그림이 100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때만큼 기쁘진 않았다”고 말했다.

 장샤오강, 중국 현대미술 붐을 견인한 화가다. 2011년 그는 ‘생존 중국 미술가 중 가장 그림 값이 비싼 사내’로 꼽혔다. ‘영원한 사랑’(1988)이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110억원까지 치솟았다. 이 기록은 지난해 쩡판즈(‘최후의 만찬’, 약 250억원)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경매 소식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일 홍콩 소더비에서 ‘혈연 : 대가족 No.3’(1995)이 약 128억원에 팔리며 자신의 기록을 넘어섰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홀에서 화가는 방문객을 맞았다. 들어서자마자 방문객의 시선을 끈 것은 실물 크기의 대리석 침대. 2010년 베이징 금일미술관의 ‘16:9’ 전시에 내놓았던 작품이다.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침대를 실제 조각으로 만들어 전시장에 놓으며 새로운 실험을 보여줬다.

창가엔 분재가 주르륵 놓여 있었다. 요즘 심취한 ‘망각과 기억’ 시리즈의 소재다. 반대편 벽 하나를 가득 채운 4면화는 6년째 잡고 있는 미완성작이다. 화가는 “오전 9시쯤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오후 내내 그린다. 하루 12시간을 꼬박 그릴 때도 있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여기 가만히 앉아만 있다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앉은 소파 옆 아이디어 보드엔 레닌 모자를 쓴 젊은 날의 어머니 사진, 그에 기초해 그린 초기 ‘대가족’ 시리즈, 카프카의 초상,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 회화 등이 가득 붙어 있었다. 세상은 10년, 20년 전 그가 그린 그림의 시장 기록을 뒤쫓는다. 그러나 그는 작업실 문을 닫아걸고 새로운 시리즈를 모색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붙여 둔 아이디어 보드(왼쪽 사진), ‘장샤오강의 머릿속’이다. 오른쪽 사진은 작업대, 쓰고 난 유화 물감들이 말라붙어 쌓여 있다. 조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그리는 그는 “그림 그리는 게 즐거워, 그 즐거움까지 공유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작품 값에 대한 질문은 백번도 더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시장에서 각광받는 ‘대가족’ 시리즈는 2003년 이후엔 그리지 않고 있다. 이미 10년쯤 전에 떠나온 ‘먼 친척 아저씨의 안부’ 같은 거다. 나는 먼저 떠나갔고, 시장은 시간이 흐른 뒤에 뒤따랐다”고 했다.

웃으며 이렇게도 덧붙였다. “지금 경매에 나오는 초창기 작품들은 실은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것들이다. 어떤 친구는 그때 받은 내 그림을 팔아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고, 다른 이는 내 그림을 가구 뒤에 덧대는 판으로 쓰다가 뜯어 팔았다.”

 ‘대가족’ 시리즈의 탄생은 이랬다. 반 고흐를 존경하던 중국의 화가는 1992년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석 달간 미술관을 돌며 책으로만 접했던 그림들을 실제로 봤다. 장샤오강은 “그저 반 고흐를 선망하는 화가가 아닌, 중국의 예술가로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귀국길 쿤밍의 고향집에서 부모님의 낡은 앨범을 들춰보게 됐다. 사진관에서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 사진사의 보정으로 어느 집이나 비슷해 보이는 가족 사진이었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시절, 직장조차 ‘단위’로 통합돼 가족적이던 시절, 사생활이 없던 시절이 거기 있었다. 애잔하고 어둡고 초현실적인 그림, ‘대가족’ 시리즈는 현대 중국의 초상화가 됐다.

 웃지 않는 인물들, 멍한 눈의 인물화는 그의 세대가 겪어온 세월이다. “어린 시절 배운 것은 오로지 정치, 정치, 정치. 국가가 알아서 정해주니 개인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대학 4학년 들어 개혁개방으로 홍수가 터진 것 마냥 한꺼번에 서양의 모든 시대 사조를 받아들였다. 90년대 후반 비로소 동양적인 것, 중국적인 것, 자아 같은 주제를 탐구할 수 있었다. 미술 시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었다.”

급변하는 세상을 허겁지겁 따라가야 했던 시절에 대해 그는 말했다. “학습하고, 성장하고, 알려지고, 폭발하고. 어찌 보면 내 연배의 미술가들은 계속 사기를 당하며 성장해 왔다.”

 - 간단히 답해보자, 당신에게 예술은.

 “유년기의 내게 예술은 종교이자 태양 같은 것, 성숙기엔 나를 치유하는 약이었다. 지금의 내게 예술은 생활, 그리하여 예술은 내 숙명이다.”

 - 논리적·철학적 배경이 이론가 못지 않다고 들었다. 중국 현대 미술에서 당신이 위치는 어디쯤일까.

 “예나 지금이나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그저 작업실일 뿐이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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