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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 조금만 치면 논밭 망치는 멧돼지·새 얼씬도 안 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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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4일 대구시 달서구 대구테크노파크 전진바이오팜 연구소에서 이태훈 대표가 ‘유해 야생동물 기피제’에 사용되는 원료를 들고 있다. 동물을 퇴치하는 천연물질이지만 사람은 냄새를 느끼지 못한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 2012년 9월 충남 공주시 이인면의 한 농가.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에 고구마밭에 들른 김준모(62)씨는 깜짝 놀랐다. 밭이 온통 쑥대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멧돼지의 소행이었다. 고구마를 싹 먹어 치운 것은 물론 군데군데 구덩이를 파놓아 한 해 농사를 망쳤다. 김씨는 “밭 주변에 그물망까지 쳐놓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그해 고구마를 예년의 10% 정도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 이듬해 10월 이 지역 농가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수확을 앞둔 고구마와 감자·땅콩 등이 밭에서 자라고 있지만 멧돼지 출몰로 피해를 본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곳곳에 야생동물 기피제(忌避劑)를 뿌려놓은 결과다. 기피제란 동물이나 해충에 자극을 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는 약제다. 실제로 경북·경남·세종시 등지의 농가에서 시험한 결과 멧돼지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김영선 공주시 환경정책담당은 “기피제를 써 본 농가 262곳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주민 만족도가 94%였다”고 말했다. 공주시는 올해 기피제 예산으로 1억원을 확보했다.

 국내에서 멧돼지 등 농가에 해를 끼치는 야생동물을 막아주는 ‘유해 야생동물 기피제’ 시장을 새로이 개척한 사람이 이태훈(42) 전진바이오팜 대표다. 그는 국내에서 생소한 분야인 기피제와 10년 넘게 씨름해왔다. 농작물 피해의 주범인 멧돼지를 비롯해 비둘기·까치 등 유해 조류를 대상으로 하는 기피제를 만들어냈다.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작은 호기심이었다. 2003년 경북대 수의학대학원에서 항생제를 연구하던 중 문득 ‘새가 싫어하는 것은 뭘까’ ‘멧돼지를 죽이지 않고 쫓을 수 없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당시 야생동물로 인한 농가의 피해는 사회적 이슈였다. 하지만 이 분야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대표의 도전이 시작됐다.

 “동물이 어떤 물질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분야에 심취하게 됐어요. 기존에 동물을 죽이는 데 사용되던 살수제(殺獸劑)를 대체하는 원리죠. 친환경적인 방식을 이용해 동물을 쫓는 방향으로 접근법을 달리 해보자는 겁니다.”

‘유해 야생동물 기피제’ 100g이면 약 33㎡(10평)에 효과가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2004년 9월 그는 회사를 세우고 유해동물 퇴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앞으로 나아가자’는 의미에서 회사 이름에 ‘전진’을 넣었다. 교수나 수의사가 아닌 낯선 분야에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하자 주위에선 말렸다. 불모지로 꼽히던 기피제 분야여서 더욱 그랬다. 일부에서는 ‘수의계의 이단아’라는 비난도 나왔다. 이 대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이 분야에 비전이 있다는 확신이 들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초기엔 새들이 꺼리는 식물 추출물을 찾는 데 주력했다. 식물 500종의 천연물질을 추출해 하나하나 효과를 분석했다. 같은 식물이라도 특유의 물질을 뿜어내는 시기가 제각각이어서 계절별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던 끝에 2006년 조류 기피제 개발에 성공했다. 계피와 페퍼민트 등 허브류를 혼합해 만든 제품으로, 인체에 해가 없고 새들의 후각·시각·미각을 자극해 접근을 차단한다.

 “조류 배설물에 의한 구조물 부식, 조류인플루엔자(AI), 버드스트라이크(항공기와 조류의 충돌) 같은 문제를 자연친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농약·새총·그물망 등 기존 퇴치법에 비해 효과는 높고 비용은 적게 들죠.”

 예컨대 농가 300곳을 기준으로 할 때 조류 기피제 사용 비용은 2000만원 선이다. 조류 퇴치용 전기목책기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7000만~8000만원)의 4분의 1 수준이다. 한 번 사용하면 효과는 2년 정도 지속된다. 비나 눈이 와도 영향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전기목책기 관리비용을 감안하면 10년 기준으로 오히려 전체 비용은 기피제가 싸게 먹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은 험했다. 이 대표는 각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등에 기피제를 납품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잡상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009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신제품 인증(NEP)을 받을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설득 끝에 어렵게 해당 기관에서 제품 검증을 거치더라도 낯선 제품에 예산을 쓰려는 공무원은 거의 없었다.

 이 대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7년 일본을 시작으로 유럽·미국 등을 돌아다니면서 해외 관공서와 기업들에 제품을 알렸다. 국가별로 새로 등록을 하고 안전성을 검증받아야 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동물 기피 효과가 있다는 인증을 받으면서 현재 전진바이오팜의 조류 기피제를 사용하는 국가는 영국·중국·일본 등 25개국으로 늘었다. 영국 BBC방송은 이 대표의 조류 기피제를 소개하며 ‘미러클(기적)’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경북·경남 일대에 납품이 시작됐다.

 조류 기피제 이후 이 대표는 멧돼지나 고라니·쥐 등 유해동물을 퇴치할 수 있는 기피제에 도전했다.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안기고 있는 만큼 시장이 크다고 봤다. 이 대표는 국내외 기피제 시장의 잠재적 규모를 10조원대로 추산했다. 멧돼지 등 동물 기피제 개발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조류 기피제와 원리가 비슷해서다. 그는 “기술 전체를 100이라 할 때 80은 그대로 두고, 남은 20을 바꾸면서 멧돼지 등이 기피하는 물질로 바꾸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2012년 시장에 나온 멧돼지 기피제는 조류 기피제와 함께 전진바이오팜의 쌍두마차로 자리 잡았다. ISO9001 획득, 이노비즈 기업 지정 등을 비롯해 미국 환경보호청(EPA) 인증을 얻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특허로 등록된 기술만 10여 개다. 이들 기술을 무기로 해외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면서 매출이 뛰었다. 지난해 매출은 176억원이다. 연구개발(R&D) 인력 5명을 포함해 직원 41명이 이뤄낸 성과다. 올해 목표는 235억원이다.

 이 대표는 현재 연어 등 어류에서 기생충인 ‘바다 이(sea lice)’를 떼어내는 기피제를 개발하고 있다. 기생충 때문에 전체 연어의 20~30%가 죽어나가는 데서 착안했다. 영국 스털링대와 공동으로 기술 개발에 나섰다. 고라니·두더지 기피제와 노린재 등 해충 기피제도 만들고 있다.

 “우리 기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기피제 기술에 매진해 바이오 분야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대구=황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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