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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부활 없는 사회가 '희망의 끈' 놓게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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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그날은 가늘게 비가 내렸다. 지난해 7월 박상훈(50·가명)씨는 서울의 한 여관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40대 후반에 회사에서 조기 퇴직한 박씨는 택시 운전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사고를 내면서 보상금까지 떠안게 됐다. 퇴직금은 주식 투자로 몽땅 날린 뒤였다. 그는 방문 판매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그의 손에는 A4 용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한 시간 전 눈물을 쏟아가며 쓴 유서였다. 휘청거리는 글씨 위로 눈물 자국이 번져갔다.

 ‘사랑하는 OO 엄마, 빚만 떠넘기고 가서 정말 미안해….’

 방 한구석에선 번개탄의 맵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박씨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4160명에 이른다. 하루 평균 39명, 37분마다 한 명씩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미래 세대’인 10~30대의 사망 원인 가운데 1위가 자살이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자살을 택하게 됐을까. 본지는 최근 5년간 자살한 이들의 유서 26건을 단독 입수해 심층 분석했다. 유서는 자살한 고인의 최후 진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서 속에 비친 한국 사회는 비정한 곳이었다. 유서에는 경제적·사회적 패자에게 냉혹한 사회에 대한 원망을 담은 대목이 많았다. 지난해 취업 실패를 이유로 자살한 20대 남성은 “인생 낙오자가 살아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며 목을 매 숨졌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자살한 50대 남성도 “세상이 괴롭혀 더 견뎌낼 힘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남성은 한 중견 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다 퇴사했다. 그러나 퇴직금으로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특히 유서를 남긴 자살 사망자 중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2년 말 주식 투자 실패 등을 이유로 자살한 50대 남성은 “경제적으로 힘든데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 지난해 11월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자살예방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과제’에 따르면, 자살 충동 원인 분석에서 1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1위로 나타났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400여 건의 자살 사망자 유서를 분석·연구했던 박형민(43)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적·사회적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자살까지 생각할 수 있다”며 “특히 해결하기 힘든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면 가족·대인 관계 문제로 확산돼 자살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자살의 원인은 단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과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들이 많았다. 상당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이나 건강상 문제 등을 복합적으로 겪다가 자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0~2010년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101.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에스토니아(-42.8%) ▶스페인(-22.2%) ▶독일(-15.6%) ▶일본(-4.9%) 등의 자살 사망률이 줄어든 것과 대조적이다. 서종한 아주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자살 사망률을 떨어뜨리기 위해선 결국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강현·민경원·구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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